top of page

Adullam

편식으로 인한 우울장애, 불안장애 자녀를 가진 부모가 겪어낸 이야기
A story from a parent whose child suffered from depression and anxiety due to picky eating.

박에스더 사모

                             목차

1. 출생~3세: 금쪽같은 내 새끼, 천재의 조짐?

– 초기 편식 패턴의 무해한 시작과 영양학적 경고 신호

(편식의 초기 형성기를 다루며,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영양 불균형의 잠재적 위험을 소개합니다.)

2. 4세~9세: 영재의 길, 이대로 가자!

– 편식 습관 고착과 정서 발달의 미묘한 균열

(아동기 편식이 습관화되는 과정을 관찰하며, 자존감 형성의 연결성을 분석합니다.)

3. 10세~11세: 왜 이러지? 남들 눈치가 두렵네…

– 불안의 첫 징후와 부정적인 감정 표현의 증가

(초기 불안 증상의 등장과 편식으로 인한 영양 결핍의 초기 영향을 가족 역학으로 탐구합니다.)

4. 12세: 말더듬과 스크린 중독? 모국어 영어조차 버거운 이유

– 편식의 숨겨진 스트레스 요인

(디지털 중독 증상과 편식의 상관성을 영양학적으로 추론하며, 부모의 초기 대처 고민을 반영합니다.)

5. 13세~14세: 학교 바꾸기 도전

– 사립 학교에서 사대부중으로, 왕따의 그늘 아래

(왕따 경험과 편식 패턴의 악화가 불안 장애로 이어지는 과정을 사례 중심으로 풀어냅니다.)

6. 15세: 국제학교로의 전환, 또다시 왕따?

– 자해의 시작과 NSSI의 경고

(NSSI (비자살성 자해, wrist-cut syndrome) 를 소개하며, 편식·사회 불안의 연쇄적 악화를 영양 심리학으로 분석합니다. NSSI는 죽을 의도가 없는 감정 해소 행위로, 청소년 스트레스·우울과 연관되며, 손목 긋기 외 다양한 형태를 포함합니다.)

7. 16세: 미국 귀환, 불안·우울의 지속

– 고등학교 졸업 가능할까? 정신과 치료와 코로나의 '호재'

(불안·우울 장애의 지속과 치료 시작을 다루며, 팬데믹이 가족 치유에 미친 영향을 영양학적 관점에서 조명합니다.)

8. 17세: 대체의학 통찰과 식이요법 도입

– 편식 문제의 뿌리, Pharm.D. 입학 여정

(대체의학 상담을 통해 편식의 영양적 원인을 탐구하고, 식이요법 및 환경요법 시작과 학업 도전을 연결합니다.)

9. 18세~20세: Pharm D자퇴와 치료요법의 시행착오

– 식이요법, 약물치료, 가족 다이나믹의 재구성

(자퇴·치유 과정의 시행착오를 통해 영양 심리학과 가족 역학의 융합적 접근을 강조하며, 결론적 통찰을 제시합니다.)

10. 21세: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 시작, 샬롬의 여명

– 회복의 빛과 지속적 예방 전략

(회복 단계와 미래 전망을 다루며, 편식·정신건강 연쇄를 끊는 장기 전략으로 마무리합니다.)

11. 이야기를 접으며

                  본문

 

1. 출생~3세: 금쪽같은 내 새끼, 천재의 조짐? – 초기 편식 패턴의 무해한 시작과 영양학적 경고 신호

결혼 후 약 3년 만에 첫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처음 2년은 의도적인 가족계획 아래 피임을 철저히 했고, 그 후 아이를 갖기 위해 약 1년 동안 부부가 함께 노력한 끝에 얻은 귀한 선물이었다. 임신 소식을 접한 순간, 내 마음속에는 이미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빛을 발할 특별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싹텄다. 산모교실에서 배운 대로, 임신 기간 내내 태교에 신경을 썼다.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고, 산책하며 자연의 소리를 느끼게 했으며, 영양 균형 잡힌 식단으로 태아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이 아이가 얼마나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랄지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딸아이가 태어났다. 출생 직후부터 아이는 주변을 놀라게 할 만큼 활기차고 호기심 많아 보였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나는 신생아 육아에 대한 책들을 탐독하며 최선의 환경을 조성하려 애썼다. 모유 수유를 기본으로 하되, 필요 시 분유를 보충하며 영양 공급에 만전을 기했다. 아이의 첫 울음소리, 첫 미소, 첫 뒤집기 – 모든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세 살이 되기 전까지 딸아이는 다방면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였다. 한글 말하기와 읽기, 간단한 산수, 그림 그리기, 그리고 또래 아이들과의 사회성까지. 주변 어른들은 "이 아이는 정말 똑똑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만 18개월에 기저귀를 완전히 떼고, 만 두 살 반쯤 되자 간단한 한글 낱말 카드를 스스로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속으로 '우리 아이가 천재는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이의 발달 속도가 책에 나오는 평균치를 훨씬 앞지르고 있었으니까.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출생 후부터 나는 아이에게 최대한 많은 자극을 주려 노력하는 '극성스러운' 엄마였다. 음악 교육은 필수였다.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배경으로 놀이를 하게 했고, 다양한 장난감으로 촉감 놀이를 시켰다. 주말이면 공원이나 동물원으로 데려가 새로운 풍경과 소리를 경험하게 했으며, 그림책 읽어주기는 매일의 루틴이었다. 이러한 자극이 아이의 뇌 발달을 활성화할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아이는 내 '커리큘럼'을 잘 따라주었다. 놀이 시간, 옷 입히기, 심지어 치장까지 –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이는 비교적 순종적이었고,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 시기, 아이를 '금쪽같은 내 새끼'로 여기며, 미래의 천재로 키우겠다는 야심찬 꿈을 키웠다. 부모로서의 자부심이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3세가 되기 직전,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이에게 심한 편식이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는 사소해 보였다. 음식의 모양이나 질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예를 들어, 당근의 부드러운 질감을 싫어해 야채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는 바쁜 일상 속에서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당시 나는 간호사로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오가며 근무 중이었고, 의료인으로서의 지식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편식을 '어린아이들의 흔한 단계'로 치부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넘어갔다.

편식의 종류는 점점 늘어났다. 처음에는 야채를 피하더니, 곧 과일로 확대되었다. 사과나 바나나처럼 부드러운 과일조차 "이상해"라고 하며 거부했다. 그 다음은 고기였다. 고기의 쫄깃한 질감이 싫다고 했다. 억지로 먹이려 하면 아이는 금방 토할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아이가 초킹(질식)할까 봐, 또는 호흡기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즉시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 주로 탄수화물 중심의 밥이나 빵, 달콤한 간식으로 대체했다. 바쁜 스케줄 탓에 제대로 된 식단 관리를 할 여력이 없었고, "아이가 천재인데 영양이 뭐 대수냐"는 안일한 생각으로 합리화했다. 3세쯤 되면 생리적인 편식이 올 수 있다는 주변 엄마들의 조언도 이를 뒷받침했다. 그렇게 수많은 핑계를 대며 나는 아이의 편식을 방치했다.

이 초기 편식 패턴은 무해해 보였지만, 사실 영양학적 경고 신호의 시작이었다. 영유아기 (1~5세)는 성장 속도가 완만해지지만 활동량이 많아 체중당 영양소 필요량이 여전히 높다. 특히 철분과 칼슘 부족에 주의해야 하며, 이는 빈혈이나 성장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 편식이 지속되면 영양 불균형이 발생해 저체중이나 비만, 식품 알레르기 등의 문제가 생길 위험이 높아진다. 우리 아이처럼 야채, 과일, 고기를 피하는 패턴은 필수 비타민 (비타민 C, A 등), 미네랄 (철분 아연), 단백질 섭취를 제한해 면역력 저하나 성장 둔화를 초래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유아의 편식은 나이가 어릴수록 심하고, 부모의 강제나 무관심이 이를 악화시킨다. 나는 부모로서의 과도한 기대, 아이가 ‘천재’라는 환상, 에 사로잡혀 이러한 신호를 놓쳤다. 아이의 지적 발달에만 집중하다 보니, 신체적 영양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간과한 셈이다.

더욱이, 편식은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니다. 영양결핍은 피로, 집중력 저하, 빈혈등의 증상을 유발하며, 장기적으로는 학습 능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가 설탕이 많은 음료나 간식을 자주 먹게 되면, 이는 영양 과잉과 불균형을 동시에 초래해 비만 위험을 높인다. 우리 집에서도 아이의 편식을 메우기 위해 달콤한 주스나 과자를 자주 주었는데, 이는 5세 미만 유아에게 권장되지 않는 습관이었다. 부모의 무지와 바쁜 생활이 이러한 패턴을 형성하게 한 것이다. 만약 그 때 영양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더라면, 예를 들어 다양한 음식을 재미있게 소개하거나 강제 대신 선택권을 주는 방법으로 편식을 예방할 수 있었을텐데…

이 시기 편식의 무해한 듯한 시작은 실제로 영양 불균형의 잠재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이의 성장에 필수적인 주 영양소 (에너지, 단백질, 무기질, 비타민)가 부족하면 제중증가 둔화나 면역 체계 약화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편식이 심한 아이들은 측정 가능한 성장 지표 (키, 체중)에서 평균 이하를 보이곤 한다. 나는 아이의 지능 발달에만 매달려, 이러한 영양학적 경고를 무시했다. ‘천재의 조짐’이라는 환상에 빠져, 아이의 전인적 성장을 놓친 셈이다. 이 경험은 나중에 후회로 돌아왔지만, 그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 초기의 실수는 나중에 더 큰 축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

이 초기 단계에서 부모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과도한 기대는 아이의 약점을 가려 보이지 않게 만들고, 영양 불균형은 장기적인 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속적인 편식으로 인한 영양 결핍은 성장 지연, 면역력 저하, 또는 학습 능력 저하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 만약 비슷한 상황의 부모라면 편식을 당연히 경험되는 단계로 치부하지 말고 조기에 대처하는 것이 필수다. 전문가 상담을 받거나 균형잡힌 식단 계획을 세우는 것을 적극 고려하길 바란다.

이때 부모의 창의적인 음식 만들기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단순히 강제하는 대신, 아이를 참여시켜 재미를 더하는 접근이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아이와 함께 음식을 만들어보는 공동 활동을 통해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다. 아이가 혐오하는 음식 재료는 창의적으로 커버하는 기술을 활용해보자. 당근이나 브로콜리 같은 야채를 갈아서 스무디나 소스에 섞어 넣거나, 튀김으로 덮어 바삭한 식감을 더하는 등의 창조적인 준비 방법이 도움이 된다. 또한, 칭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가 새로운 음식을 시도할 때 ‘잘했어! 정말 용감하네’처럼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면 아이의 동기를 높일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방법도 유용하다. ‘작년에는 이 음식을 싫어했는데 지금은 조금 먹어보니 어때? 네가 더 커서 강해졌구나!’라고 말하며 아이의 성장을 강조하면 자연스럽게 편식을 줄일 수 있다.

첫째 아이 때 3세의 편식을 방치해 큰 어려움과 도전을 겪었던 경험을 거울삼아, 둘째 아이 때는 최대한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도 영양이 충분히 보충될 수 있도록 조리법을 창의적으로 개발했다. 이 접근은 단순히 아이의 취향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영양 불균형을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예를 들어, 아이가 일정 기간 동안 밥과 조미된 김만 먹는 '편식 모드'에 빠져들었던 때가 상당히 길었다. 이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밥을 기본으로 하되 영양 밀도를 높이는 방법을 고안했다. 백미 대신 현미, 오트, 보리를 번갈아 섞어 밥을 지었고, 여기에 소량의 찹쌀을 더해 부드러운 식감을 유지했다. 현미와 같은 통곡물은 섬유질, 비타민 B군, 철분, 마그네슘 등이 풍부해 아이의 소화 건강과 에너지 지속성을 지원하며, 편식하는 아이들에게도 지속적인 영양 공급을 돕는다. 오트와 보리는 뇌 발달에 유익한 영양소를 제공하며, 아이의 면역력 강화와 장기적인 성장에 기여한다. 이러한 혼합은 아이가 모르는 사이에 다양한 곡물의 이점을 섭취하게 만들어, 편식을 자연스럽게 완화하는 효과를 보였다.

또한 밥물을 넣을 때는 물 대신 미리 준비한 육수나 채수를 대체해 영양을 더했다. 채수는 특히 아이의 편식 패턴에 적합한 선택이었다. 멸치, 말린 버섯, 말린 새우, 파 뿌리, 양파, 다시마, 황태 등을 잘 말려 갈아놓은 분말을 기반으로 당근과 여러 야채 (브로콜리, 시금치 등)를 넣고 천천히 삶아 고아낸 물을 사용했다. 이 채수는 영양 흡수를 돕는 미네랄과 비타민을 풍부하게 함유하며, 아이의 뇌 기능과 면역 체계를 강화하는 데 유용하다. 특히, 다시마와 같은 재료는 아이오딘 공급원으로 작용해 갑상선 건강을 지원하고, 전체적으로 영양 밀도가 높은 국물로 변신해 아이가 싫어하는 야채의 맛을 은은하게 가려주었다. 육수를 만들 때는 유사한 방법으로 진행하되, 바다 생선류 대신 소고기 뼈를 활용해 고아냈다. 소고기 뼈 육수는 콜라겐, 아미노산, 칼슘, 마그네슘, 인 등의 영양소를 제공하며, 아이의 뼈 건강과 소화 기능을 돕는다. 이는 관절 통증 완화와 면역력 강화에도 기여할 수 있어 편식으로 인한 영양 결핍을 보완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창의적인 조리법은 아이가 밥과 김만 먹는 기간에도 균형잡힌 영양을 섭취하게 해 주었고, 첫째 아이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해 준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우리 첫째 아이의 경우, 이 무해한 듯한 시작이 이후 더 큰 도전을 불어일으켰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초기 편식을 방치한 결과, 영양 불균형이 쌓여 건강 문제로 이어졌고, 이를 바로잡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부모로서의 반성은, 아이의 전인적 성장을 위해 지적 발달 만큼이나 영양 관리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2. 4세~9세: 영재의 길, 이대로 가자! – 편식 습관 고착과 정서 발달의 미묘한 균열 

첫아이에게 3세 때부터 시작된 편식 습관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처음에는 아이의 단순한 음식 취향 문제로 가볍게 여겼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의 전체 식단을 지배하는 고착된 패턴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 습관은 아이가 특정 음식만 고집하게 만들었고, 결국 영양 균형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출생부터 3세까지의 시기는 아이의 발달이 눈부시게 빠르고 건강하게 진행되어, 부모로서의 자부심과 기쁨이 컸다. 언어 습득, 운동 능력, 사회성 등 모든 면에서 또래를 앞서는 듯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미래를 밝게 전망했다. 그러나 3세 이후부터 편식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고, 이는 우리의 안일한 태도를 깨우는 신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인지되지 못했다.

아이의 식단을 다시 돌이켜 분석해 보니, 그 편향성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주로 섭취하는 음식들이 밥, 빵, 면류, 감자 제품 등 탄수화물 중심으로 치우쳐 있었고, 이는 우연이 아닌 지속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예를 들어, 아침에는 토스트나 시리얼만 고집하고, 점심과 저녁에는 밥이나 파스타에 국한되어 채소나 단백질은 거의 외면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의 성장에 필수적인 영양소 (비타민, 미네랄, 단백질, 건강한 지방 등)의 섭취가 점점 부족해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이의 외형이 건강해 보이고,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 표면적인 모습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의 학업적·사회적 성과가 뛰어나 보였기 때문에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 선생님의 칭찬을 자주 받고,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등) 식단 문제는 사소한 개인 취향으로 치부되었다. 이는 부모로서의 짧은 시야로 인한 실수였으며, 영양 불균형이 쌓이면서 아이의 에너지 수준이 불안정해지고 집중력이 미묘하게 저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무관심은 결국 아이의 장기적인 건강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오류로 드러났다. 편식으로 인한 영양 결핍은 면역력 약화, 성장 지연, 심지어 정서적 불안정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때 이미 습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혀 있었다. 이 경험은 내게 부모로서의 책임을 새삼 일깨워주었고, 아이의 건강을 단순히 외형이나 성과로 판단하지 말고, 일상적인 식습관부터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구체적으로, 아이는 어릴 때부터 모든 종류의 면을 매우 좋아해, 이는 편식 습관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라면, 스파게티, 일반 국수, 우동 등 면의 형태나 요리 방식에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즐겼다. 예를 들어, 집에서 간단한 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 때 아이는 소스에 섞인 야채나 토마토 조각을 일일이 골라내고 면 부분만 집중적으로 먹었지만, 그마저도 먹어준다는 사실에 부모로서 만족감을 느꼈다. 외출 시에도 면 요리가 메인인 식당을 자연스럽게 선호하게 되었고, 이는 점차 아이의 식단 전체를 면 중심으로 재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심지어 파스타 전문점에서 크림 파스타나 알프레도 같은 풍부한 메뉴를 주문할 때도, 치즈나 다른 재료는 걷어내고 면만 주로 섭취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아이의 밝은 미소를 보며 나는 그 문제를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면류는 대부분 정제된 탄수화물로 구성되어 있어, 섭취 시 빠른 에너지 공급을 제공하지만 장기적으로 혈당 변동을 일으키고 영양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어린이의 탄수화물 과다 섭취는 비만과 당뇨 위험 증가, 그리고 인지 기능 저하를 유발할 위험이 있으며, 특히 70세 이상 노인 연구를 어린이로 확대 적용할 때도 유사한 패턴이 관찰된다. 우리 아이의 경우, 이러한 면류 중심 식단이 편식의 기반을 더욱 강화하며, 단백질, 채소, 과일 등 다른 영양소 섭취를 극도로 제한했다. 이로 인해 아이는 하루 종일 활발하게 놀고 활동하는 듯 보였지만, 저녁이 되면 집중력이 급격히 저하되거나 피곤함을 호소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는 탄수화물 과잉으로 인한 혈당 스파이크와 그 후의 급락 현상의 결과로 보였다. 이 패턴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영양 불균형이 쌓여 아이의 신체적·정신적 안정성을 서서히 훼손하는 신호였다.

또한, 프렌치 프라이는 딸아이의 '최애' 음식으로 부상하며, 브런치나 간식으로 자주 선택되는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프렌치 프라이를 먹는 시간이 아이에게 가장 즐거운 식사 순간으로 각인되었고, 이는 부모로서의 나를 기쁘게 하면서도 습관화의 함정을 파놓았다. 처음에는 주말 브런치의 특별한 재미로 시작했지만, 점점 일상화되어 주중에도 아이의 "프라이 먹고 싶어!"라는 요구에 따라 가까운 패스트푸드 체인으로 향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돌아온 후 아이의 간절한 부탁에 편의상 드라이브스루를 이용하곤 했는데, 이는 순간의 편안함을 주었지만 장기적인 건강 문제를 키우는 선택이었다. 프렌치 프라이는 감자를 기반으로 한 탄수화물 덩어리로, 고온의 기름에 튀겨져 칼로리가 높고 영양 밀도가 극히 낮다. 아이가 이를 과도하게 섭취하면 지방과 나트륨 과잉으로 이어져 심혈관 질환 위험을 높일 뿐만 아니라, 포만감을 주면서도 필수 비타민과 미네랄을 거의 제공하지 않아 전체 식단을 빈곤하게 만든다. 연구에서 지적하듯, 이러한 고탄수화물·고지방 음식의 과잉은 어린이의 비만과 당뇨 위험을 증가시키며, 인지 기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는 아이가 웃으며 먹는 모습을 보며 일시적인 만족을 느꼈지만, 이는 사실 장기적으로 영양 결핍의 씨앗을 심는 행위였다. 이 습관은 아이의 키 증가를 둔화시키고 오히려 체중만 불균형하게 증가시킬 수 있으며, 피부 상태(예: 건조함이나 여드름 증가)나 머리카락의 건강(머리카락이 가늘어지며 전체적인 모발 밀도가 감소하는 현상)에도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를 단순히 성장기의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며, 더 깊은 원인을 탐색하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은 부모로서의 무지와 안일함이 아이의 건강을 어떻게 잠식하는지 깨닫게 해준 후회스러운 교훈으로 남았다.

3세 전후에는 야채를 강한 소스, 예를 들어 카레나 스튜와 함께 조리하면 그럭저럭 먹일 수 있었다. 당근이나 브로콜리를 잘게 썰어 카레에 섞어 넣으면 아이가 모르는 사이에 섭취하게 할 수 있었고, 이는 한 끼 식사를 영양적으로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방법은 아이의 편식을 완화하는 임시 방편으로 작용했으며, 부모로서의 나에게는 작은 승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초등학교 1~2학년 이후로는 그마저도 완강히 거부하기 시작했다. "야채 맛이 느껴져"라며 입에 대지 않았고, 소스를 아무리 강하게 조미해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시금치나 호박 같은 부드럽고 맛이 순한 야채조차 피하며, "녹색은 싫어!"라고 소리치곤 했다. 이 거부감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습관화된 패턴으로 굳어졌고, 아이의 식단에서 야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야채를 피하는 습관은 비타민 A, C, K, 그리고 섬유질 부족을 초래한다. 특히 어린이의 경우, 야채 섭취 부족은 면역력 저하와 변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성장 지연과 만성 질환 위험을 높인다. 우리 아이처럼 야채를 완전히 배제하면, 항산화물질과 미네랄(예: 칼륨, 마그네슘) 섭취가 줄어들어 피로와 집중력 저하가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낮은 과일과 야채 섭취는 어린이의 선형 성장 지연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영양 불균형이 신체 발달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아이의 거부감을 단순한 생리적 발달 단계나 개인 취향으로 여겨 강제하지 않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로 인해 아이는 변비를 자주 겪었고, 면역력이 약해져 감기에 잘 걸렸지만, 나는 이를 "어린아이들 다 그렇지"라고 치부하며 더 깊은 원인을 탐색하지 않았다. 이 안일함은 아이의 건강을 잠식하는 치명적인 실수로, 나중에 후회로 돌아왔다.

고기에 대한 거부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드러났다. 아이는 고기의 씹는 질감과 특유의 식감을 싫어했고, 특정 고기의 모양 (예를 들어 고기의 결이 훤히 보이는 소고기나 돼지고기)을 보면 식욕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호소했다. 처음에는 스테이크나 볶음 요리를 시도하며 아이의 입맛을 맞춰보려 했지만, 아이는 한 입 베어 물고 바로 뱉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닭고기나 생선조차 "비린내 난다"며 피했고, 결국 단백질 공급원이 거의 없어져 식단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 거부는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감각적 불편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으며, 아이의 식사 시간을 스트레스 가득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고기를 피하는 것은 단백질, 철분, 아연, 비타민 B12 부족으로 이어진다. 철분 결핍은 빈혈을 유발해 피로와 학습 능력 저하를 초래하며, 아연 부족은 면역 체계 약화와 성장 둔화를 일으킬 수 있다. 비타민 B12는 주로 동물성 식품에서 얻어지므로, 고기 섭취를 피하면 신경계 발달에 문제가 생길 위험이 있다. 우리 아이의 경우, 이 부족이 쌓이면서 키 성장 속도가 동급생에 비해 느려졌고, 빈혈 증상이 의심되었지만, 정기 검진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에 따르면, 육류를 소비하는 아이들은 특정 영양소(예: 철분, 아연)에서 더 나은 상태를 보이지만, 육류를 피하는 아이들은 포화지방산과 PUFA (Polyunsaturated Fatty Acids) 섭취 불균형으로 영양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이러한 영양 결핍은 아이의 에너지 수준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장기적으로는 학습과 사회성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당시 나는 아이의 편식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육아' 관점에서 문제를 최소화했으며, 이는 결국 아이의 건강 기반을 약화시키는 선택으로 이어졌다. 이 경험은 부모로서의 책임이 단순한 음식 제공을 넘어 영양 교육과 습관 형성에 있음을 깨닫게 해준 귀한 교훈이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아이는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는 비타민 B12 부족으로 인해 신경계 발달에 위험 신호가 나타난 것으로, 특히 불안 장애 형태로 표출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비타민 B12는 뇌의 신경 전달 물질 합성과 myelin sheath(수초) 형성에 필수적이며, 부족 시 뇌 기능 저하가 발생해 불안, 과민성, 또는 정서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아이는 어디선가 들은 납치(kidnapping) 이야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누군가 자신을 납치할까 봐 두려워하며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낮 시간에도 문밖을 나설 때마다 불안감을 호소하곤 했고, 이는 학교 가기나 친구 만나기 같은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부모로서의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허리케인이 불어와 집이 날아가면 어떻게 하냐고 무서워하면서, 집의 문이 나무가 아닌 금속으로 된 튼튼한 집으로 이사 가자고 한동안 졸랐다. 이러한 과도한 공포는 단순한 어린아이의 상상력이 아니라, 영양 결핍으로 인한 뇌 기능 저하가 불안 장애를 초래한 초기 징후로 보인다. 이 모든 증상들은 아마도 지속적인 영양 불균형이 아이의 정서적 안정성을 약화시킨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연구에 따르면, B12 부족은 어린이와 청소년에서 불안 증상과 우울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이는 조기 개입이 없으면 장기적인 정신 건강 문제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아이의 편식이 이러한 영양 결핍을 쌓아가고 그에 따른 증상들이 미세하게 있었지만, 나는 이를 간과했다. 왜냐하면 아이의 사회적·학업적 측면에서 뛰어난 성과 (예를 들어 학교에서 상위권 성적과 친구들 사이의 리더십)가 모든 것을 가려주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똑똑하고 활발한데, 먹는 게 뭐 대수냐"는 안일한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이는 부모로서의 짧은 시야가 초래한 실수였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매우 활발했다. 단순한 활발함을 넘어 모든 일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곤 했으며,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서도 인정받는 부분이었다. 보드 게임을 할 때도 늘 탁월하게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전략을 세워 승리하곤 했고, 놀이터에서 놀 때도 도전적인 놀이기구를 겁 없이 타며 능숙하게 마스터할 때까지 끈기 있게 연습하는 기질을 보였다. 또한 재치와 유머 덕분에 동네 아이들이 딸을 졸졸 따라다니며 놀았고, 가까이 사는 사촌들도 그녀를 거의 우상처럼 여겨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보드게임, 놀이, 피아노, 공부 등 모든 분야에서 탁월함과 리더십을 보이던 딸이었기에 편식의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은 나에게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활발함 뒤에는 영양 결핍으로 인한 미묘한 정서적 균열이 숨어 있었다. 예를 들어, 아이는 가끔 불안감을 호소하거나, 피로로 인해 친구들과의 놀이를 포기하는 일이 생겼지만, 나는 이를 과도한 활동 탓으로 돌렸다. 이 과정은 영양 불균형이 아이의 에너지 수준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잠재적인 불안 증상을 증폭시켰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부모로서의 조기 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준 후회스러운 부분이다.

이러한 편식 습관에 따라, 어느덧 나는 요리를 아이의 취향에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요리는 창의적이지 않았다. 단순히 아이가 좋아하는 면이나 감자 요리를 반복할 뿐, 다양한 영양소를 숨기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스파게티에 야채를 갈아 넣거나 고기를 다져 섞는 대신, 그냥 플레인 면을 삶아 주었고, 이는 아이의 선호를 우선시하는 단기적 편의에 그쳤다. 이 접근은 오히려 편식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아이가 새로운 음식을 시도할 기회를 박탈했다.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무관심이나 적응적 요리가 편식을 장기화시키며, 아이의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부모가 아이의 거부감을 수용하고 취향에 맞춰 요리를 조정할수록, 아이는 점점 더 제한된 식단에 익숙해져 영양 불균형이 고착화되기 쉽다. 또한, 아이와 함께하는 외식은 대부분 프렌치 프라이가 있는 패스트푸드점으로 한정되었다. 주말 가족 나들이가 맥도날드나 버거킹 방문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영양 불균형을 악화시켰다. 패스트푸드의 고칼로리·저영양 식단은 비만 위험을 높이며, 특히 어린이에게는 심혈관 건강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연구에서 지적하듯, 패스트푸드 소비는 과체중과 비만 증가를 유발하며, 장기적으로 당뇨, 대사 증후군, 심혈관 질환 위험을 높인다. 이 과정에서 가족 식사 시간이 단조로워지면서, 아이의 정서적 안정감도 약해졌고, 음식을 둘러싼 갈등이 점점 쌓여갔다. 패스트푸드 중심의 식사가 반복되면서 가족 간의 대화나 공유의 기회가 줄어들었고, 이는 아이의 사회적·정서적 발달에도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9살, 3학년까지 딸아이의 편식은 점점 강화되었고,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여러 위험 신호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키 증가가 둔화되거나 피로를 호소하는 증상이 가끔 있었지만, 나는 이를 "성장기 피로"로 치부했다. 실제로, 편식의 장기적 영향은 저체중, 성장 지연, 영양 결핍, 그리고 심지어 정신건강 문제(예: 불안, 우울)로 이어질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지속적인 편식은 체중 감소, 키 성장 저하, 그리고 우울이나 불안 같은 심리적 문제를 초래하며, 이는 청소년기나 성인기까지 이어질 수 있다. 부모로서 나는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무지했다. 아이의 '천재적' 면모—학업 성적 상위권과 리더십—에 매몰되어 전인적 성장을 놓쳤던 것이다. 이 경험은 나중에 큰 후회로 돌아왔지만, 그 시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편식의 악화는 단순한 식습관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미래 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신호였다. 탄수화물 위주 식단은 에너지 과잉과 영양 부족을 동시에 초래하며, 야채와 고기 피함은 필수 영양소 결핍을 불러온다. 만약 조기에 대처했다면, 예를 들어 영양사 상담이나 창의적 요리법 도입, 또는 가족 식사 규칙 설정으로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첫째 아이의 실수는 둘째 아이 육아에서 교훈이 되었지만, 그 대가는 컸다. 부모들은 편식을 당연히 거쳐가는 생리적 단계로 치부하지 말고, 아이의 전체 발달을 고려한 균형 잡힌 접근을 취해야 한다. 특히, 영재적 기질을 보이는 아이일수록 영양이 정서적 안정과 자존감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3. 10세~11세: 왜 이러지? 남들 눈치가 두렵네… – 불안의 첫 징후와 부정적인 감정 표현의 증가

미국 초등학교의 커리큘럼을 자세히 살펴보면, 킨더가든(유치원)부터 2학년까지는 정말 기본적이고 간단한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알파벳 배우기, 간단한 덧셈과 뺄셈,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그리고 창의적인 놀이 활동이 주를 이룬다. 이 시기에는 한국에서 갓 이민 온 아이들도 별다른 추가 공부 없이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을 만큼 난이도가 낮다. 우리 가족처럼 이민 온 1세대 한국계 가정에서는 이 부분이 큰 안도감을 준다. 아이들이 영어를 익히는 데 부담이 적고, 학교 생활이 즐거운 놀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K-2학년 커리큘럼은 아이들의 사회적·정서적 발달을 강조하며, 읽기와 수학의 기초를 놀이 중심으로 다루어 스트레스를 최소화한다. 그러나 내 경험상, 3학년부터는 상황이 급변한다. 갑자기 수학이 더 복잡해지고, 읽기 자료가 길어지며, 과학이나 사회 같은 과목에서 개념 이해가 요구되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쉽다. 특히, 우리 딸 아이처럼 한국어와 영어를 병행하며 자란 아이에게는 언어 장벽이 더해져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미국 교육 체계에서 3학년은 전환점으로 여겨지는데, 초등 교육의 상위 단계로 들어서며 경제학 기본 개념, 미국 역사 개요, 과학 실험 같은 더 깊은 주제를 다룬다. 이러한 커리큘럼 변화는 아이들의 인지 발달을 촉진하지만,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압박으로 작용한다. 딸의 경우, 이 시기가 불안의 시작점이 되었고, 학교 생활이 더 이상 놀이가 아닌 도전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급격한 난이도 상승은 아이들의 동기부여를 떨어뜨릴 수 있으며, 특히 이민 가정 아이들에게는 문화적 적응과 병행되어 정서적 어려움을 증폭시킬 수 있다.

3학년 때부터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엑스트라 커리큘러 활동으로 오케스트라나 합창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아이들의 예술적 재능을 키우고, 팀워크를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된다. 학교에서 악기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악기를 선택하지 않은 아이들은 자동으로 합창단에 배정된다.

 

우리 딸 아이는 야심차게 바이올린을 선택했다. "엄마, 나 바이올린 할래! 멋있을 것 같아!" 하며 눈을 반짝이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즉시 3개월 렌탈 계약을 맺고, 작은 바이올린을 학교에 가져다주었다. 처음 며칠은 신나서 연습하던 아이였지만, 불과 몇 주 만에 "엄마, 하기 싫어. 너무 어려워"라고 포기 선언을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연습하다가 실수하면 친구들이 웃을까 봐 무서워"라는 대답이 나왔다. 결국 바이올린을 반납하고 합창단으로 옮겼다. 이 순간부터 딸아이의 입에서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안 돼", "나는 못 해", "선생님이 날 싫어해",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봐" 같은 말들이 일상이 되었다. 피아노 레슨도 마찬가지다. 초보 단계에서는 즐겁게 하던 애가 조금만 곡이 어려워지면 "나는 재능 없어, 그만할래" 하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남편과 나는 "악기를 다 포기했으니 피아노라도 계속 해라"라고 만류하며 레슨을 지속시켰지만, 그때 이미 아이의 마음속에 불안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이 포기 패턴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이들의 불안 증상에서 흔히 관찰된다. 딸 아이처럼 사회적 압박을 느끼는 아이들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때마다 미리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위축된다. 연구에 따르면, 완벽주의와 실패 공포는 음악 수업 같은 활동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이는 어린이의 불안 장애를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 이 경험은 부모로서의 나에게, 아이의 흥미를 강제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불안을 키울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 교훈이었다.

3학년은 그래도 학교 생활이 무난하게 지나갔다. 딸아이는 여전히 밝고 활동적인 아이로 보였고, 친구들도 많았으니까. 이 시기 아이의 외향적인 모습은 부모로서의 우리에게 안심을 주었으며, 학교가 여전히 즐거운 공간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부터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걸 싫어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오늘은 가기 싫어, 배 아파" 하며 울며불며 버티는 아이를 보며 우리는 처음으로 깊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 거부 증상은 어린이 불안 장애의 전형적인 신호로, 종종 신체적 불편함(예: 복통, 두통)으로 위장되어 나타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봐", "나만 빼고 다들 재미있게 노는 것 같아", “나를 좋아하는 친구가 없어”라는 오해가 쏟아지곤 했다. 이러한 사회적 오해와 고립감은 불안이 초래하는 왜곡된 인지 패턴으로, 아이가 주변을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매 학기 두 번씩 열리는 선생님-부모 컨퍼런스에서 담임 선생님의 피드백은 더 충격적이었다. "당신의 딸은 매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라서 수업 시간에 손을 잘 들지 않고, 발표를 어려워해요. 친구들과의 상호작용도 소극적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집에서 아이는 너무 활발하고, 한국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던 아이였으니까. 우리 부부는 "선생님이 아이를 제대로 관찰하지 않은 거야"라고 서로 위로하며 선생님을 불신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피드백은 딸의 불안 증상이 학교라는 공공 장소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신호였다. 학교 환경은 집과 달리 평가와 비교가 빈번한 곳이므로, 불안이 있는 아이들은 더 소극적으로 변한다. 연구에 따르면, 불안 장애 아동은 학교에서 과도한 경계심과 위축을 보이며, 이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제한하고 학업 성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 딸아이의 경우, 이 피드백이 가족에게 첫 번째 경고등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선생님의 평가 부족 및 관찰력 부족 탓으로 돌려버렸다. 부모의 이러한 부정적 반응은 아이의 불안을 악화시킬 수 있으며, 전문가들은 부모가 아이의 증상을 인정하고 지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권장한다.

4학년 어느 가을 저녁, 학교 오케스트라 발표회가 있었다. 부모님들을 초대해 아이들이 연주를 선보이는 행사였다. 우리는 기대에 부풀어 자리에 앉았다. 무대 위를 보니 딸 아이는 합창단원 사이에 서 있었고, 딸의 한국 친구들은 각자 바이올린, 첼로, 드럼 같은 악기를 들고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빛나고 있었다. 딸 아이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멀리서 손을 저으며 "쳐다보지 마!"라고 소리 없이 입 모양을 지었다. 사진을 찍으려 하자 얼굴을 찡그리며 화를 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우리는 당황스럽고 화가 났었다. "왜 부모가 와서 응원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행동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 뒤로도 그 기억은 우리를 괴롭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딸 아이는 당시 이미 불안 장애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이올린을 포기한 것도 실수할까 봐 두려워서 미리 포기한 선택이었고, 합창단에서조차 자신의 목소리가 튀지 않을까 걱정하며 긴장했던 거였다.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 표현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더 깊은 문제의 징후였다. 발표회 같은 공개 행사는 불안이 강도가 크게 느껴지는 아이들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는데, 딸은 부모의 시선조차 부담으로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연구에 따르면, 불안이 있는 아이들은 과외 활동에서 사회적 압박을 느끼며 위축될 수 있으며, 이는 실패 공포와 연결되어 활동 참여를 제한한다. 이 에피소드는 가족 역학에서 부모의 기대가 아이의 불안을 어떻게 증폭시키는지 보여준다. 부모가 아이의 불안을 인정하지 않고 화를 내거나 강제하면, 아이의 증상이 악화될 수 있으며, 지지적인 태도가 더 효과적이다. 이 사건은 우리 가족에게 불안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준 전환점이 되었지만, 당시 우리는 그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특히, 딸의 편식 습관이 이 불안 증상을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훗날 깨달았다. 딸아이는 어릴 때부터 채소나 단백질을 거의 먹지 않고, 주로 밥, 빵, 과자 같은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고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다 그렇지"라고 가볍게 여겼지만, 이는 영양 결핍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영양 결핍된 아이들은 뇌신경 전달물질(예: 세로토닌, 도파민)이 제대로 생성되지 않아 부정적인 감정이 과도하게 나타난다. 긍정적인 반응보다 부정적인 반응이 월등히 많아진다. 딸의 경우, 이 결핍이 불안과 연결되어 "나는 못 해"라는 자기 부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철분이나 마그네슘 결핍은 아이들의 불안과 사회 문제를 증가시키며, 편식 아이들에게 흔한 현상이다. 철분 결핍은 빈혈을 통해 피로와 학습 저하를 유발하고, 마그네슘 부족은 스트레스 대처 능력을 약화시켜 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다. 가족 역학으로 보자면, 우리 부부는 딸 아이의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더 열심히 해라"라는 훈계로 대응했다. 남편은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봐"라고 격려했지만, 딸에게는 그 말이 압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나 역시 바쁜 일상 속에서 딸 아이의 식단을 강제하지 않고,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라고 방관하곤 했다. 이 무지는 아이의 불안을 키우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편식은 단순한 식습관이 아니라, 영양 불균형을 초래해 기분 장애를 유발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채소를 거부할 때마다 우리는 대체 음식을 주었지만, 이는 탄수화물 중독을 강화하고, 뇌 기능에 악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패턴은 아이의 장기적인 정서 안정성을 해치며, 부모의 무관심이 악순환을 가속화할 수 있다.

불안한 날들이 쌓이면서 딸 아이는 모든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일 학교에서 발표할 텐데, 실수하면 어떡해?" 하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잦아졌다. 심지어 교회 주일학교조차 가기 싫어했다. "주일학교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봐. 나 싫어할 거야"라는 오해 때문이었다. 딸 아이는 친구들의 사소한 표정이나 말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나 왕따 당하는 것 같아"라고 울며 호소하곤 했다. 실제로 딸은 친구들과 잘 지내는 아이였지만, 불안이 그 인식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한번은 교회 친구들과 슬립오버(잠자리 파티)를 했다. 딸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 세 명과 함께한 그날, 우리는 기대하며 픽업하러 갔다. 그런데 아이가 차에 타자마자 "다시는 이 친구들하고 슬립오버 안 할 거야!"라고 선언했다. 이유를 물으니 "나만 제대로 낄 수 없었어. 재미없었어"라는 대답이다.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딸 아이는 모든 상황을 미리 걱정하며 긴장했을 것이다. "말 실수하면 어떡해? 행동 잘못하면 친구들이 싫어할까?" 이런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고립감을 느꼈을 것이다. 친구들은 아무 문제 없이 즐겼을 텐데, 아이의 불안이 그 밤을 고통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불안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보여주며, 편식으로 인한 영양 결핍이 감정 조절 어려움을 증폭시킨 예이다. 딸 아이처럼 감정 통제가 어려운 아이들은 편식과 불안의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연구에 따르면, 불안이 높은 아이들은 새로운 음식에 대한 두려움이 강해 편식을 지속하고, 이는 다시 영양 결핍을 통해 불안을 악화시키는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이 과정은 부모의 조기 개입이 없으면 장기적인 정신 건강 문제로 이어질 수 있으며, 우리 가족의 경우처럼 영양과 정서의 연결성을 간과한 대가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시기 딸의 편식은 더욱 심각해졌다. 아침은 시리얼로 대충 때우고, 점심은 학교 급식 중 빵만 골라 먹으며, 저녁은 밥과 김치 정도로 만족하는 패턴이 고착되었다. 탄수화물에 중독된 듯이 먹는 데만 집착하며, 다른 음식을 극도로 거부했다. "채소 먹으면 토할 것 같아" 하며 울며불며 피하는 모습이 잦아졌고, 이는 단순한 취향 문제를 넘어 감각적 불편함과 연결된 듯했다. 우리는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마"라고 말하며 방관했지만, 이는 명백한 실수였다. 영양 결핍이 불안을 증폭시키고, 불안이 다시 편식을 부추기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지속적인 편식은 우울증, 사회 불안, 학습 장애를 초래할 수 있으며, 부모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가족으로서 우리는 딸의 미세한 변화를 무시했다. 불안을 "성격 탓"으로 치부하고, 영양 문제를 "아이 성장 과정의 일부"로 여겼다. 남편과 나는 바쁜 직장 생활에 쫓겨 아이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다. 교회나 가족 모임에서 딸의 부정적인 반응을 목격해도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라고 훈계하기에 급급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할 기회를 놓쳤고, 전문적인 도움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 무지는 딸의 고통을 연장시켰다. 우리 부부는 딸의 식단을 제대로 감독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외면함으로써 문제를 키웠다. 이러한 부모의 방관은 아이의 영양 상태를 악화시키며, 뇌 기능 저하를 유발해 부정적인 감정 패턴을 강화한다.

돌이켜보니, 10~11세는 딸의 불안이 뿌리를 내린 결정적 시기였다. 부정적인 감정 표현이 증가한 것은 단순한 사춘기 전조가 아니라, 영양 결핍과 가족 역학의 복합적 결과였다. 우리는 딸의 신호를 "아이답지 않은 행동"으로 오해하며 잘못 대응했다. 만약 그때 영양사를 찾아 식단을 조정하거나 상담사를 통해 불안을 진단했다면 어땠을까? 최근 연구들은 영양 보충이 불안 증상을 완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리처럼 이민 1세대 가정에서 문화적 식습관이 편식을 유발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이민 가정의 아이들은 전통 음식(예: 밥 중심 식단)과 새로운 문화 음식의 충돌로 편식이 심화될 수 있으며, 이는 영양 불균형을 초래해 정서적 문제를 악화시킨다.

이 경험은 우리 가족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아이의 작은 변화도 무시하지 말고, 가족 전체가 함께 대처해야 한다는 점. 불안은 보이지 않는 적처럼 서서히 다가오지만, 사랑과 이해로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 딸의 여정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이 시기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이의 불안은 단지 개인 문제라기보다 가족 환경과 영양 상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부모로서의 반성은 계속되어야 하며, 전문 도움을 받는 것이 핵심이다. 이 교훈을 바탕으로 아이의 미래를 더 밝게 만들기 위해 우리 가족은 단합하고 있다.

4. 12세: 말더듬과 스크린 중독? 모국어 영어조차 버거운 이유 – 편식의 숨겨진 스트레스 요인

우리 부부의 여정은 2001년 가을,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그때는 단풍이 만발한 계절로, 연세대학교 캠퍼스 주변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잎사귀가 바람에 스치며 속삭이는 소리가 우리의 미래를 예언하는 듯했으며, 그 속에서 남편은 연세대학교 기상학과에서 오존층 연구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진행 중이었다. 단순히 과학자로서의 길을 꿈꾸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너머에 더 큰 비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3국으로 선교사로 나아가, 그곳 대학 캠퍼스에서 젊은이들에게 과학 지식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삶. 이 꿈은 우리 결혼 생활의 기반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구름 연구를 세부 전공으로 삼아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비전을 공유하며 더 깊은 유대감을 쌓았고, 미래를 향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나날을 보냈다.

우리는 결혼한 지 2년 만인 2003년에 미국 아이오와 주로 떠났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가 남편의 박사 과정 목적지였으며, 그곳은 미국 중부의 광활한 평야 지대에 위치한 에임스(Ames)라는 작은 도시였다.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에 가까운 이곳은 끝없는 옥수수 밭과 조용한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2000년대 초반 에임스의 인구는 약 5만 명 정도로, 아이오와 주립대학교(ISU)가 도시의 중심을 이루며 대학 도시로서의 활기를 더해주었다. 대평원 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고, 대학 덕분에 연구와 교육이 번성하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영혼을 시험하듯 했고, 여름에는 습한 더위가 피부에 달라붙어 끈적한 땀방울을 맺히게 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황금빛 옥수수 밭이 바람에 물결치듯 흔들리는 그 광경은 하나님의 창조물 속에서 우리의 여정을 축복하는 은혜의 노래처럼 느껴졌다. 이 새로운 환경은 우리에게 문화적 적응의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남편의 학업과 선교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 귀한 장소로 기억된다. 에임스의 평화로운 일상은 우리 가족의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미국 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디며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갔다.

유학 준비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남편은 한국에서 수십 곳의 미국 대학에 지원서를 보냈으며, 각 지원서에는 그의 연구 계획서와 추천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서 수정 작업을 반복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 부부의 결의와 인내를 상징하는 듯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매일 새벽 기도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새벽 5시, 아직 어두운 거리를 걸어 교회로 향하는 그 길이 우리에게는 희망의 통로이자 영적 충전의 시간이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손을 꼭 잡고 걷는 그 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며,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시련을 이겨냈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남편의 기도는 구체적이고 확신에 차 있었다. "지원한 대학 중에서 풀 스칼라십과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곳으로 인도해 주세요." 그는 하나님의 응답은 명확하고 헷갈리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그 믿음은 곧 현실이 되었다. 20여 개 대학 중 단 한 곳, 아이오와 주립대학교(Iowa State University)에서만 입학 허가서와 I-20 서류가 도착했다.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라고 확신했으며, 이 선택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우리의 선교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완벽한 여정의 시작으로 느껴졌다. 1858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명망 높은 공립 연구 대학으로, 특히 남편의 구름 연구 전공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했다.

짐을 챙겨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낯선 땅에서 시작하는 새 삶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 담긴 비전, 과학 지식을 통해 젊은이들을 선교하는 꿈,이 우리를 지탱해 주었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이 남편의 연구 주제처럼 우리 미래를 상징하는 듯했다. 부드러운 구름의 솜털이 하늘을 수놓는 그 광경은 하나님의 약속처럼 우리를 감싸 안아주었고, 이 여정은 단순한 학업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 아래 펼쳐지는 더 큰 모험의 서막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에임스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신앙 생활과 학업에 몰두했다. 남편은 박사 과정에 집중하며 구름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을 쌓아 나갔고, 나는 그 후 일 년 반 후에 미국에서 간호사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2000년대 미국 간호사 환경은 한국과 크게 달랐는데, 한국에서는 간호사 한 명당 12~14명 환자를 맡아 고강도 노동이 일상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일반 병동에서 4~5명, 중환자실에서 1:2 비율로 배정되었고 보조 인력도 충분했다. 이로 인해 피로가 적고 처우가 좋았으며, 이는 우리 가족의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던 중 약 1년 후,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찾아왔다: 첫 딸의 임신이었다. 하지만 이 임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결혼 후 2년 동안 의도적으로 피임을 했고, 우리가 계획한 대로 임신이 바로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마음이 낮아지면서, 과거의 선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임신 시기를 정하려 했던 것,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았던 것을 회개했다. 기도와 함께 노력한 지 7개월 만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순간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 기쁨은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의 비처럼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불임 기간의 원인이 내 편식 습관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의 편식도 어쩌면 내 유전적 영향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그 속에서 우리는 믿음의 깊이를 더해갔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야채를 다양하게 먹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는 버릇이 있었고, 고기 중에서도 돼지고기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소고기나 닭고기는 가끔 먹었지만, 요리 실력이 부족해 자연스럽게 탄수화물 중심의 식단이 되었다. 물국수, 비빔국수, 스파게티, 라면, 덮밥, 된장국밥 같은 메뉴가 내 레퍼토리의 전부였으며, 이 음식들은 대부분 탄수화물이 주를 이루었고 영양 균형이 무너지기 쉬웠다. 편식이 몸에 스며든 탓에 건강이 약해졌고, 그로 인한 불임이 찾아온 것 같아 후회스럽다. 영양 불균형이 생식 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 경험은 단순한 개인적 후회가 아니라, 영양 상태가 가족의 미래에 미치는 깊은 영향을 깨닫게 해준 귀한 교훈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 후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가 빛나고, 그 연약함을 통해 우리를 더 강하게 세우시는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의 식탁이 하나님의 창조물로 가득 찬 은혜의 장소임을 깨닫게 된 그 순간들, 이제는 감사로 가득하다.

2004년, 에임스의 작은 병원에서 딸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순간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며, 남편과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안았다. 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끝없는 옥수수 밭이 우리 가족의 새 시작을 축복하는 듯했다. 그 황금빛 물결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처럼 우리의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 같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기쁨을 맛보았다. 에임스는 동양인이 드문 곳이었기에, 딸아이의 주변은 자연스럽게 영어권 친구들로 채워졌다. 아이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익혔고, 이는 이민 가정의 아이들이 흔히 겪는 언어 적응 과정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어를 잃지 않게 하려 애썼다. 집에서 한글 학습지를 매일 시키고, 저녁마다 한국어 동화책을 읽어주며 이중 언어 환경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아이가 잘 따라주는 모습이 기특하고 신기했다. 프리스쿨과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아이는 탁월한 평가를 받았고, 이중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보며 우리의 양육법이 옳다고 자부했다. 담임 선생님과의 컨퍼런스에서 "아이가 똑똑하고 지시를 잘 따릅니다"라는 칭찬을 들을 때마다 뿌듯함이 밀려왔으며, 이는 부모로서의 성취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외형적인 성공 뒤에는 아이의 내면을 헤아리지 못한 우리의 맹점이 숨어 있었다. 그 학습지가 스트레스일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으며, 아이가 느끼는 압박을 간과한 채 성과만을 중시했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지적하시며 더 깊은 사랑으로 인도하셨음을 깨닫는다.

아이의 편식 습관이 점점 드러나면서, 이는 단순한 선호가 아닌 ARFID(선택적 섭식 장애)와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우리 딸의 경우, 이 편식이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영양 불균형을 초래하며, 잠재적인 불안 증상을 키운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경험은 부모로서의 반성을 불러일으키며, 아이의 외적 성과에만 매몰되지 않고 내면적 건강을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하지만 그 교훈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빛나고, 우리의 실수조차 그분의 계획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는 그 사랑에 감격한다.

딸아이의 이중 언어 실력은 3학년 무렵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교 커리큘럼이 심화되면서 영어 사용이 급격히 늘어났고, 이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언어 우선순위를 변화시켰다. 집에서 한국어로 말하라고 권면했지만, 아이는 "학교 공부에 방해되도 괜찮아?"라고 반박하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 말에 위축된 나는 마음속으로 영어를 우선시하게 되었고,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영어가 더 중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한국 책을 읽기 싫어한 것도 편식으로 인한 부정적 감정의 연장선일 수 있다. 만약 아이가 골고루 먹는 습관을 가졌다면, 영양 균형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더 안정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편식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이제야 실감한다.

딸아이가 킨더가든에 들어갈 무렵, 가족의 생활이 또 변화했다. 남편은 박사 과정을 거의 마무리지며,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로 포스트닥 연구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내가 박사 과정을 시작한 곳이기도 했지만, 당시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 2004년 출산 후 2005년부터 간호사로 복귀한 나는 미국의 근무 환경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처우가 좋고, 일 강도가 낮았으며 연봉은 두 배 이상이었다. 성인 중환자실에서 일했는데, 미국은 3교대가 아닌 2교대가 일반적이었고, 환자 지속성을 위해 12시간 근무를 강조했다. 주 3일 근무로 풀타임 조건인 40시간이 거의 다 채워지니 여유가 있었으며, 이는 가족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는 간호사 한 명당 12~14명 환자를 맡았지만, 미국 일반 병동은 4~5명, 중환자실은 1:2 비율이었다. 또한 간호보조원, 환자 체위 변경 팀 등, 보조 인력이 충분해 피로가 적었고, 이는 내 업무 만족도를 높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풀타임, 파트타임, 퍼디엄 세 직장을 가졌으며, 돈은 많이 벌었지만 피로는 쌓였다. 가족 돌보기는 소홀해졌고, 주일 예배에서도 졸기 일쑤였다. 돈 추구가 삶의 중심이 된 셈이다. 이 시기 나의 높은 샐러리는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안정감을 주었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가족 시간이 줄어들게 했고, 이는 훗날 아이의 정서적 안정에 미묘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퍼디엄 근무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온 그날 저녁, 풀타임 직장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환자가 몰려 스태프가 부족하다는 급박한 소식이었다. 이미 교대 시간이 2시간이나 지났지만, 그들은 12시간 근무로 카운트해 주겠다는 유혹적인 제안을 했고, 나는 초과 수당 1.5배를 계산하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추가 근무를 선택한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정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배정된 환자는 상태가 위중했으며, 혈액 검사가 시급히 필요했지만 이전 채혈 시도가 여러 번 실패로 지연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손이 무뎌서 그런가" 하는 교만한 생각이 스치며, 젓가락 문화로 단련된 내 예민한 손 기술을 보여주려 환자 방으로 들어갔다. 혈관이 선명히 보였는데 왜 다른 간호사들과 검사실 테크니션들이 채혈에 실패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 있게 채혈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주사기에 담긴 혈액을 튜브로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로 내 손을 찔렀다. 그것도 모자라 판단력 저하로 인해 환자 혈액을 내 손에 찌르자마자 주사기 플런지를 눌러서 내 손에 주입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다만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믿을 뿐이다.

사고 후 차트를 확인하니 환자는 말기 에이즈 환자로, 각종 성병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충격과 공포가 밀려왔고, 응급 조치를 받으며 워커스 컴펜세이션 센터로 가는 길에 눈물이 흘렀다. 후회와 두려움, 만약 에이즈에 감염된다면 사회적으로 외면당할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남편에게 전화해 떨리는 목소리로 "나 에이즈 환자 피를 나한테 주사했어..."라고 말하자,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외롭지 않게 해줄게, 나도 같이 에이즈에 걸릴게"라고 응답하며 내 마음을 읽은 듯한 위로를 건넸다. 그 말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나누겠다는 깊은 사랑의 표현으로 느껴져 큰 위안이 되었다.

예방 치료는 공격적이었고, 2000년대 HIV 노출 후 예방요법(PEP)은 부작용이 심했다. 메스꺼움, 피로, 두통, 구토 등이 흔했으며, 나는 체중 감소와 설사로 고통받았다. 병가를 내고 새벽 예배에 나가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3개월 이상을 치료받으며 새벽예배에 나가기를 반복했다. 데굴데굴 구르며 어느 날 새벽기도에서 기도하던 중 학개 1:6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이 말씀은 내 돈 추구가 헛된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회개하며 울었다. 그 끝에 하나님은 캠퍼스 사역자 비전을 주셨다: 남편과 평행한 동역자로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역할. 그래서 나는 가장 싫던 공부를 연장하는 것을 사명으로 받아 박사 과정에 지원하기로 결심했으며, 풀 스칼라십과 스타이펜드 조건으로 기도하니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 나는 2008년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남편의 아이오와와 4시간 거리라 2년간 주말 부부 생활을 했으며, 딸과 나는 네브라스카에, 남편은 아이오와에 머물렀다. 이 시기가 미국에 넘어가 살아온 시간 중 가장 우리 부부에게는 도전이 되고 힘든 시간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주말마다 만나는 시간이 소중해졌고 우리 부부는 더욱 애틋해 졌으나, 여전히 딸아이의 편식을 문제로 인지하지는 못했다. 이 모든 여정이 편식의 그림자가 짙어지는데 한 몫을 하고 있었음을 그때는 인지하지 못했다. 이 시련은 결국 우리 가족의 영적·정서적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여겨지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교훈은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2012년, 내가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마무리 지으며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그때 남편은 이미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한 지 2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의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으로의 이동 과정도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아래에서 이뤄진 기적 같은 여정이었다. 2010년, 남편이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 그는 박사후 연구원 자리를 찾기 위해 미국 전역의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 지원서를 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관문이 좁은 곳으로 알려진 브룩헤이븐 국립 연구소(Brookhaven National Laboratory)에서 인터뷰 연락이 왔다. 이 연구소는 미국 동부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세계적인 과학 연구 기관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와 관련된 원자력 연구로 유명하며, 아인슈타인 시대부터 핵물리학과 분자 물리학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브룩헤이븐에서의 박사후 연구원 자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경험을 쌓은 연구자들은 이후 명문 대학의 교수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과학계에서 '황금 티켓'으로 여겨졌다. 이 과정은 단순한 직업 이동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 생활과 영적 여정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전환점으로, 하나님의 인도가 어떻게 예상치 못한 기회를 통해 펼쳐지는지 깨닫게 해준 귀한 경험이었다.

남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인터뷰는 2박 3일의 빡빡한 일정으로 진행되었고, 그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50명 가까운 뛰어난 박사급 연구자들 앞에서 자신의 연구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했다. 그 자리에서 남편은 긴장감에 떨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 청중이 내 입술을 통해 나가는 하나님의 지혜에 압도되게 만들어 주옵소서." 이 기도는 이후 큰 발표를 앞둔 그의 습관이 되었으며, 단순한 형식적 주문이 아니라 깊은 믿음의 표현으로, 압박 속에서도 평안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 통보를 받았고, 평소 칭찬에 인색했던 그의 지도 교수조차 "이건 정말 대단한 성과야!"라고 기뻐하며 축하했다. 브룩헤이븐에서의 포스트닥은 연구 환경이 뛰어나고, 다양한 과학 전문가들과 협업할 기회가 많아 과학자로서의 성장을 보장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 합격은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딜레마를 가져왔다. 브룩헤이븐은 뉴욕주에 위치해 네브라스카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박사 과정에 입학한 지 2년이 지난 상황에서, 남편의 이동은 또다시 주말 부부나 이산가족 생활을 의미했다. 이 딜레마는 단순한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정서적·영양적 안정성을 시험하는 또 하나의 도전으로 다가왔다.

남편은 가족이 또다시 이산가족이 되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했다. 당시 BNL에 지원서를 낼 때 그는 당연히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을 가장 먼저 살폈다. 아마 당시 잡 오프닝이 있었다면 주저 없이 그는 내가 있는 네브라스카 대학에 지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공석에 대한 오프닝이 없었기에 그는 브룩헤이븐으로 어플라이 할 수밖에 없었다. BNL 오퍼를 받은 후, 그는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 대기과학과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력과 브룩헤이븐 오퍼를 알리는 이메일을 보냈다. 놀랍게도 한 교수가 즉시 응답했다. "현재 공석은 없지만,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당신을 데려오고 싶다." 미국 고등교육 기관에서 풀타임 직위를 얻는 데는 보통 수개월에서 일년이 걸리는데, 남편의 경우는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순식간에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에서 박사후 연구원 오퍼를 받았고, 그는 자신의 영구 커리어 대신 가족과 신앙 생활을 우선시하는 선택을 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느껴졌고, 우리 부부는 가족의 유대를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가 네브라스카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지 2년 차가 되던 해, 남편은 갑작스러운 선언을 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부르심을 주셨어." 우리는 몇 년 전부터 북한의 평양 과학기술대학교를 선교지로 정하고 기도해 왔었다. 미국 코스타 수련회에서 만나 4년간 교제해오던 평과대 재직중이었던 선교사님의 영향으로, 그곳에서 과학 지식을 전하며 복음을 나누는 비전을 품었다. 하지만 남편은 연구원 생활 중에 목회자로의 콜링을 받았다고 했다. 이 콜링은 단순한 직업 변화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전체 여정에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한 하나님의 섭리로 느껴졌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영적 성장을 경험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지금? 선교지에서 목회를 해도 되지 않아?" 남편의 대답은 명쾌했다. "선교지에서 돌아와 신학을 공부하는 선교사들을 많이 봤어. 우리도 미리 신학을 하고 떠나자." 그제야 그의 콜링이 머리로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이 가슴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당시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의 담임 목사님도 남편의 콜링을 적극 지지하며 멘토링을 해주셨다. 목사님은 "이 콜링은 하나님의 계획이야"라고 격려하시며, 신학대학 3년 내내 교회에서 후원을 약속했다. 그렇게 우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이 위치한 뉴저지주 프린스턴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신학교는 1812년에 설립된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신학교로, 개혁주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세계적인 신학 교육 기관이다. 마스터 오브 디비니티(MDiv) 프로그램을 비롯해 다양한 신학 석사와 박사 과정이 유명하며, 학생들은 신학적 깊이와 실천적 리더십을 동시에 배운다. 프린스턴으로의 이주는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도전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프린스턴으로 이주한 때는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였다. 프린스턴은 역사적인 도시로, 프린스턴 대학교와 신학교가 어우러진 학문의 중심지였다. 이 시기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영적·정서적 재정립의 기회로, 훗날 딸의 불안 증상과 연결된 편식 문제의 뿌리를 더 깊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곳에서 두 해가 지나갈 무렵, 나는 뉴저지 시립대학(New Jersey City University, NJCU)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이민 1세대로서 영어로 강의하고 연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정년 트랙의 조교수는 대외적인 연구 펀드를 가져와야 한다는 부담이 늘 자리하고 있기에, 밤낮으로 연구 아이디어에 몰두해 있을 때가 많았다. 이뿐 아니라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내 지식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할 때 느껴지는 상실감을 느껴야 했고 이에 대한 스트레스가 가장 컸다. 발음과 문화 차이로 인해 오해가 생기기도 했고, 연구 논문 작성 시 영어 표현의 미묘함이 장벽이 되어 스트레스가 쌓였다. 이 모든 압박은 단순한 직업적 어려움이 아니라,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적응 과정에서 오는 깊은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이 스트레스를 피하고자 나는 한국 대학에 교수 임용을 지원했다. 여러 곳에 지원서를 보낸 끝에 대구대학교에서 오퍼를 받았고, 이는 나에게 기회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기러기 생활'을 선택하는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그 댓가를 오랫동안 치르게 될 줄은 미처 몰랐으며, 이는 훗날 우리 가족의 정서적 균열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었다. 학기 중에는 한국에서 지내고, 여름 방학에만 미국으로 돌아와 딸과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기에 바빴고, 딸 돌보기는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과중한 학업으로 딸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기 어려웠을 텐데, 그 미안함에 핸드폰을 쥐여주었다. 딸은 규칙을 어기고 밤늦게까지 핸드폰을 하며 잠을 설쳤다. 한번은 딸이 밤에 몰래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하다가 남편에게 걸려 호되게 혼난 적도 있었지만, 이러한 몰래 불끄고 하는 게임은 아이의 불규칙한 수면 패턴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우리 가족의 분산된 생활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성장과 영양 관리에 미묘한 영향을 미친 중대한 선택으로, 훗날 후회로 남았다.

떨어져 지낸 지 1년이 지나 방학에 재회했을 때, 딸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를 보며 수줍어하고 말수가 줄었으며, 5학년을 마친 시기였다. 그 변화는 단순한 성장 과정이 아니라, 분리된 생활이 초래한 정서적 흔적으로 느껴졌고, 부모로서의 죄책감이 밀려왔다. 한편 남편은 감사하게도 3년 만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고시를 한 번에 통과해 안수를 받았다.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졌다. 졸업 후, 그는 원래 섬기던 필라델피아 안디옥 교회를 계속 섬기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이사했다. 딸아이는 6학년이 되어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이 도시의 학교 시스템은 6학년부터 중학교에 속했다. 통화할 때마다 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외향적이었던 아이가 내향적으로 변했다. 이 변화는 학교 환경의 압박과 가족 분리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였으며, 아이의 사회적 적응력이 점차 약화되는 신호였다.

중학교 홈룸 선생님과의 컨퍼런스에서 "당신의 딸아이는 극도로 내향적이며, 그룹 토의나 발표를 거의 하지 않아요"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이는 4학년 때 들었던 것과 비슷했지만, 강도가 훨씬 세졌으며, 아이의 불안이 깊어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한국에서 돌아온 두 번째 여름,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딸은 웃음이 사라지고 부정적인 반응만 보였다. 모든 것을 걱정하고 비관적으로 보는 패턴이 체질화된 듯했으며, 이는 단순한 사춘기 증상이 아니라 깊이 뿌리내린 정서적 고통으로 느껴졌다. 아빠와 둘이 지내는 동안의 식단을 떠올려보라. 요리에 관심 없던 남편과 이미 편식이 심했던 딸이 함께라면, 탄수화물 중심의 간단한 식사가 주를 이룰 터였다. 라면, 빵, 파스타 같은 음식이 반복되었을 테고, 이는 영양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나는 간호학과 교수로서 의료인 중 한명이었으며 내가 학부때 공부한 생물학과 생리학 및 영양학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도 이러한 알고리듬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내 가족과 내 아이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엄마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자각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전문 지식이 삶에 적용되지 않을 때의 무기력함을 깨닫게 해준 뼈아픈 교훈이었다.

편식, 특히 ARFID(선택적 섭식 장애)와 유사한 패턴은 아이의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은 음식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영양 부족이 쌓이고, 이는 감정 조절 장애로 이어진다. 엄마의 부재는 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을 텐데, 당시 우리 부부는 이를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 생활에 최선을 다하며 딸을 위한 기도를 이어갔다. 하지만 기러기 생활의 피로는 남편에게도 컸다. 그는 한국 대학 오프닝을 기도하며 찾았고, 감사하게도 같은 도시의 경북대학교에서 초빙 연구교수 오퍼를 받았다. 당시 필라델피아 안디옥 교회 호성기 목사님은 우리를 "한국 캠퍼스 선교사"로 파송해 주셨다. "미전도 종족은 복음화율 4% 미만인데, 한국 대학 캠퍼스는 평균 3%도 안 돼요. 당신들은 미전도 종족으로 가는 선교사들입니다." 이 말씀은 은혜로웠다. 2010년대 초반 한국 대학 캠퍼스의 복음화율은 실제로 낮았으며, 기독교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에서 쇠퇴 조짐이 보였다. 미전도 종족이었던 평양으로의 선교길이 좌절되었을 때의 낙심이 이때 다 보상되는 느낌이었고, 감사했다. 이 순간, 감사가 지나쳐서 교만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역시 나는 남들이 하기 어려운 미전도 종족 선교에 동참하게 되는구나 생각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교만이 움트고 있었음을 지금에서야 회개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2년 만에 한국에서 재결합했다. 재결합 후, 나는 이전과 다른 딸을 마주했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히 싫어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인사한 후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 모습은 단순한 사춘기 변화가 아니라, 오랜 분리 생활이 초래한 정서적 상처로 느껴졌지만, 나는 이 문제를 애써 외면하며 함께 사는 감사와 밝은 미래만 꿈꾸었다. 딸이 한국에 오기 전, 나는 대구 지역 최고의 사립 초등학교를 찾았고, 계성 초등학교를 선택했다. 크리스천 학교로 영어 교육을 강조하는 곳이었으며, 비싼 학비를 치르며 아이가 신앙과 지식을 자연스럽게 겸비할 거라 착각했다. 그러나 첫 컨퍼런스 날, 믿을 수 없는 피드백을 들었다. "딸아이가 발표를 거의 안 해요. 눈을 아래로 깔고 말을 더듬어요. 영어 발표 때는 더 심해요. 한국어 부족으로 주요 과목 성적이 떨어져요." 지금까지의 컨퍼런스 중 최악이었으며, 실망과 분노가 치밀어 딸에게 다그쳤다.

딸은 "친구들이 나를 우습게 봐. 찐따라고 생각해. 선생님도 공부 못하는 애를 싫어해. 왕따 당하는 것 같아"라고 부정적인 말과 생각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오해와 추측이었으며, 부정적 사고 패턴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에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이는 편식의 어두운 그림자였고, 영양 부족이 뇌 기능에 영향을 주어 부정적 사고를 강화한다. 그러나 이 이해는 3년 후에야 왔으며, 당시 나는 딸의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족 재결합의 기쁨에만 매달렸다. 당시의 나는 딸아이의 이런 문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래서 애써 외면하며 정상 아이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랐다.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딸의 불안한 언행을 보거나 다른 사람 앞에서의 딸의 불안함이 드러날 때면 아이에 대한 실망이 커져 그것을 그대로 아이에게 표현하고 설명했다. 이것이 아이에게 더 큰 불안과 부담을 안겼을 것이고 그로 인해 아이는 매사에 수행능력이 탁월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부모로서의 무지와 선택이 아이의 삶에 미친 장기적 영향을 깨닫게 해준 뼈아픈 교훈으로 남았으며, 단순한 재결합의 기쁨이 아닌 가족 전체의 치유와 균형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모든 여정이 편식과 정신 건강의 연쇄를 깨닫는 긴 과정의 시작이었다. 가족의 식단 관리는 전체 건강을 좌우하며, 균형 잡힌 영양소 섭취가 감정 안정과 인지 발달을 지원한다. 우리 가족의 경험은 영양 불균형이 어떻게 세대 간 고통으로 이어지는지를 교훈으로 남겼다. 아이의 불안함의 증가는 피할 곳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나는 스크린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불안이 스크린 타임으로 이어지면 사회 기술 발달이 저해되어 악순환이 발생한다. 2년간 아이를 외롭게 했다는 죄책감에 나는 아이와 한국에서 만나자마자 6학년을 반복하는 딸에게 당시 시대에 뒤지지 않는 좋은 성능의 스마트폰을 사줬다. 그게 언어때문에 6학년까지 미국에서 마쳤음에도 다시 한국에서 6학년을 반복시켰던 나의 결정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나는 딸에게서 위기나 문제가 발견될 때마다 하지 말아야 하는 보상으로 딸의 치료를 방해하고 있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부모의 실수가 아니라, 불안의 근본 원인을 외면한 채 증상을 완화하려는 단기적 대처로, 아이의 장기적 회복을 저해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딸은 점점 더 스마트폰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친정 가족과 만날 때도 시댁 가족과 만날 때도, 만나고 헤어질 때 간단한 인사만 할 뿐 그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방안에 박혀서 스마트폰과 대화할 뿐이었으며, 그 모습이 답답해 보여 혼내면 딸은 지지 않고 반항했다. 우리 부부가 주는 어떤 방법의 훈육도 딸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는 것이 우리 부부도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여기면서 방관자적 스탠스를 취했던 기간도 많았음을 인정한다. 아이가 스크린과 가까이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의 피플 스킬은 한없이 추락해갔다. 그러다가 말 더듬이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는 당연히 학교의 발표력으로 이어졌고, 그 이후 한국에서의 선생님과 컨퍼런스 시간엔 빠지지 않고 딸이 말을 더듬는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나는 자신 있게 "영어 시간은 아니지요?" 물어보았지만, 어의 없게도 영어로 발표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참으로 낙심이 되고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성장 과정의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적인 영양 불균형과 스크린 과도 사용이 결합된 결과로, 아이의 사회적·언어적 발달을 저해하는 복합적인 문제로 이어진 듯하다.

당시 딸은 한국의 편의점에 매료되어 마치 그곳에서 사는 듯한 생활을 했다. 미국과 달리 집에서 걸어나가면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점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한다. 편의점에서의 주식은 주로 정크푸드나 라면, 3분 요리들 또는 삼각 김밥 등 누가 봐도 탄수화물 범벅이었으며, 이는 아이의 편식 습관을 더욱 강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어느 부분에서도 딸아이의 부정적인 반응은 다 설명이 될 정도로 당시 딸의 상황은 총체적인 난국 같았으며, 이 모든 증상은 영양 불균형이 쌓여온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영양 불균형은 불안과 사회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며, 단순한 식습관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전체적인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복합적인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5. 13세~14세: 학교 바꾸기 도전 – 사립 학교에서 사대부중으로, 왕따의 그늘 아래 

딸아이가 7학년, 즉 한국 중학교 1학년으로 올라가던 해에 우리 부부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바로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이었다. 40세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둘째를 간절히 바랐지만, 임신이 잘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딸아이는 외동으로 자랐고, 내 나이가 40을 넘어서자 더 이상은 불가능할 거라 여겨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포기한 마음의 빈자리를 메우듯, 둘째는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찾아왔다. 그 순간, 가슴속에 스며드는 따스한 빛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졌고, 마치 잃어버린 꿈이 다시 피어나는 봄비처럼 우리의 삶을 적셔주었다. 처음에는 황당함과 함께 약간의 부끄러움마저 느껴졌다. 만 나이 41세에 임신하는 일은 그 당시(2010년대 초반) 아직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출산도 지연되는 추세라 고령 임신이 덜 낯설지만, 그때만 해도 40대 초반의 '초고령 임산부'는 주변에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이렇게 보니, 유년기의 가난은 나에게 주어진 또 다른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이 결핍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 때로는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은혜로운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이제야 내 인생의 깊은 층위를 더해준다. 이 모든 여정 속에서 둘째의 도착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반성이 어우러진 소중한 결실로 느껴진다.

임신 소식을 접한 후, 나는 무의식중에 딸의 문제를 서둘러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마치 새로운 생명의 도착을 앞두고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처럼, 딸의 불안과 고립감을 빨리 해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딸이 처음 다녔던 사립학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딸의 바람대로 공립학교로 전학을 결정했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데이터 중심'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러 학교의 교육 수준, 학생 구성, 학업 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학교가 교육의 질과 학생들의 수준이 가장 우수하다는 평판을 가진 곳 중 하나로 꼽혔다. 입학을 위해 우리는 그 학교 학군 내 아파트로 이사까지 감행했다. 덕분에 딸은 집에서 도보로 편안하게 통학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친구들과의 소통이 늘고, 학교 생활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도 들려왔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과거와 똑같은 부정적 언사가 되살아났다. "친구들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찐따라서 누구도 나랑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아", "내 인생은 너무 끔찍하고 벌받은 삶이야"라는 말에서 출발해, 급기야 "하나님은 나를 끔찍하게 벌주는 이상한 분이야"라는 오해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청소년기의 반항이 아니라, 깊이 뿌리내린 감정적 고통의 신호였다. 그 말들이 가슴을 파고드는 가시처럼 아프게 느껴졌고,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는 딸의 모습이 안타까워 새벽 기도 중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딸의 문제 행동을 마주할 때마다 세상적인 '유물론적' 접근으로 대응했다. 함께 기도하며 대화하고, 영적·감정적 지지를 주는 대신, 바쁜 교수 생활과 임신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피하려는 강박이 앞섰다. 결과적으로 딸에게는 물질적 보상 (예를 들어 좋아하는 물건 사주기나 특별한 간식 제공)이 주된 해결책이 되었다.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첩첩산중으로 키우는 실수였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자비를 베풀어 주시려 하셨음을 깨닫는다.

딸의 행동 패턴은 더욱 심각해졌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이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나는 딸에게 베드민턴 과외를 제안했다. 운동이 스트레스 해소와 자신감 향상에 도움이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딸도 흥미를 보이며 "재미있어"라고 말했지만, 그 열정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너무 힘들어, 내 한계가 넘겨지지 않아. 매번 공을 놓쳐"라고 하며 포기해버렸고, 다시 '동굴' 같은 방으로 숨어버렸다. 그 포기의 순간, 바람에 꺼져가는 촛불처럼 딸의 내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 아이의 영혼을 맡겼다. 이 과정에서 나는 또다시 영양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더욱이 영양 결핍은 아이들의 내적 동기 메커니즘을 손상시켜, 매우 수동적이고 포기하는 성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그때 딸의 식단을 더 세심하게 관리하고, 영양 보충을 통해 활동성을 지원했다면, 베드민턴처럼 작은 시도조차 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이제야 그런 후회가 밀려온다.

이 모든 경험은 나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딸의 문제는 단순한 '해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 그리고 영적·영양적 균형을 통한 전인적 접근이 필요했다. 임신이라는 새로운 시작 속에서 과거의 실수를 되새기며, 이제는 가족 전체의 건강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아직도 가슴 깊이 후회되는 점이 있다. 왜 그때, 의료인으로서 딸아이의 문제를 '편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못했을까? 지금 돌이켜보니,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부분의 날, 딸은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오다 중간에 편의점을 들러 본인이 원하는 음식들을 한 아름 사들고 방으로 직행했다. 그 내용물은 대개 정크푸드 (설탕과 지방이 듬뿍 든 과자, 탄산음료, 패스트푸드) 이거나, 아니면 탄수화물 위주의 3분 요리 제품들이었다. 내가 정성 들여 준비한 균형 잡힌 식사는 자연스럽게 딸에게 닿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순간들의 쓸쓸함이, 가을 낙엽처럼 스러지는 듯한 고독으로 가슴을 적셨다. 이러한 영양 불균형은 딸의 불안 증상과 사회적 고립감을 더욱 심화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때 딸의 식습관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영양 보충이나 균형 식단을 강제적으로 도입했다면, 문제의 뿌리를 조금 더 일찍 파헤칠 수 있었을 텐데…이제 와서야 그런 아쉬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당시 딸아이는 대구의 한 교회 중고등부를 출석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곳의 중고등부 교사들은 정말 탁월한 분들이었다. 중고등부 부장 장로님을 비롯해 딸의 담임 선생님들까지, 모두가 신앙과 교육의 균형을 잘 아우르는 훌륭한 지도자들이었다. 그 덕분에 교회 생활은 가족 모두에게 큰 위로와 재미를 주었다. 특히 남편은 그 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섬길 수 있었는데, 이는 우리 부부의 삶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남편은 경북대학교에서 연구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학부 학생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흔치 않았다. 반면 나는 전임 교수로서 매 학기 정해진 학생들의 지도교수 역할을 맡아야 했고, 이는 학생들과의 깊이 있는 소통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시기 이미, 지도교수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행위는 '학생 인권 유린'으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직접적인 전도는 부담스럽고, 때로는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우리는 믿음에 기반한 전략을 세웠다. 캠퍼스 전문인 선교사로 파송받은 우리 부부는, 각자의 역할을 활용해 영적 연결고리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학생들을 한 명당 학기에 최소 두 번씩 무조건 만나 상담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과 문제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상담 과정에서 학생의 문제가 영적·신앙적 측면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면, 나는 솔직하게 "목사님께 연결해 드려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어보았고, 동의하는 학생들에 한해 남편에게 넘겼다. 남편은 협동 목회자로서 중고등부를 맡고 있었지만, 이 전략 덕분에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따로 만나 영적 지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펼쳐지는 미묘한 선교의 연장선이었다. 딸의 문제와 병행된 이 사역은 우리 가족의 신앙 여정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딸의 영양 불균형이 신앙 생활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모든 여정은 나에게 '전인적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딸의 문제는 영양, 감정, 신앙이 얽힌 복합적 퍼즐이었고, 그 퍼즐을 풀기 위해서는 데이터나 물질적 접근이 아닌, 사랑과 지혜로운 전략이 핵심이었다. 이제 과거를 반성하며, 미래의 가족 건강을 더 세심하게 챙기고자 한다.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 중 지속적으로 신앙 생활을 원하는 이들을 교회로 연결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당시 우리 부부가 섬기던 협동 목회지였던 교회에는 간호학과 학생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함께 동역했던 중고등부 교사들 중 몇몇은 지금도 여전히 그리운 존재로,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그분들은 신앙과 교육의 균형을 잘 아우르는 탁월한 지도자들이었고, 그 덕에 교회 생활은 우리 가족에게 큰 힘과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 훌륭한 분들에게 딸아이의 근본적인 문제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했다. 어두움을 빛으로 드러낼 때 어두움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빛으로 변한다는 진리를 그때 깊이 깨달았다면, 내 반응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매 어두움이 이기지 못하더라(요 1:5)."라는 성경 말씀처럼, 투명함이 가져오는 자유를 믿었다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딸의 문제를 드러내면 그분들이 우리 부부에게 실망할까 봐 두려움이 앞섰다. 결국, 딸이 자신의 두려움을 키워나가던 그 시기, 목회자 부부로서 우리 역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키워나갔던 것 같다.

딸이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중고등부 주일학교 담임 선생님이 우리 부부에게 깊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목사님, 사모님, 혹시 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셨습니까?" 왜 그러느냐고 되묻자, 선생님은 딸 아이의 프사에 각기 다른 종류의 컵라면 10개 사진이 올라와 있고, 그 아래에 "이거 다 먹고 죽어버릴까?"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 마음은 복잡미묘했다. 솔직히 말해, 걱정보다는 수치심이 먼저 솟구쳤다. 목회자 자녀로서 내 딸이 그런 어두운 프사를 올렸고, 그것이 우리의 동역자인 중고등부 교사에게 발각되었다는 사실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딸의 자살 아이디어를 암시하는 내용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와 우리 부부는 딸에게 왜 그런 사진을 올렸냐고 다그치며 물었다. 딸의 마음속 어려움을 헤아리고 어루만지기보다는, 결과만 놓고 얼마나 미숙한 행동인지, 또한 사역하는 아빠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인지 강조하며 오히려 딸의 죄책감과 불안을 고조시켰던 것 같다. 이는 부모로서의 실수였다. 감정적 지지와 대화가 우선이었어야 했는데, 두려움과 수치심이 앞서 딸의 상처를 더 키웠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때 영양학적 개입과 함께 신앙적 치유를 병행했다면, 딸의 고통이 덜 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이 경험은 가족의 문제 해결에 있어 투명함, 사랑, 그리고 전인적 접근(영양·감정·신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그 언쟁에 가까운 대화가 끝난 후, 딸은 또다시 한국의 공립학교를 탓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공립학교 특유의 치열한 학구열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친구들이 우습게 여긴다고 믿었고, 공부 못하는 본인은 당연히 '왕따' 신세라고 자조적으로 단정 지었다. 이처럼 딸의 자아 인식은 극도로 부정적이었으며, 학교 생활을 통해 쌓인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말들이 가슴을 파고드는 칼날처럼 아프게 느껴졌고,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는 딸의 모습이 안타까워 새벽 기도 중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되새기며 반문한다. 당시 딸은 정말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것은 순전히 딸의 오해와 부정적인 생각 패턴에서 비롯된 착각이었을까?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단순히 딸의 주관적 주장이라고 넘기기에는, 학교 생활 내내 친구들의 집에 초대받거나 우리 집에 친구를 초대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점이 걸린다. 왕따라는 극단적 표현이 맞든 아니든, 적어도 딸 주변에 마음을 터놓고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었음은 분명하다. 이는 고립된 청소년기의 전형적 신호로, 더 깊은 고통의 증거였다.

이 경험은 나에게 부모로서의 한계를 일깨워주었다. 딸의 문제는 학교 환경이나 친구 관계의 표면적 요인뿐 아니라, 영양과 정신 건강의 깊은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복합적 현상이었다. 과거를 반성하며, 이제는 가족 전체의 식단과 감정적 지지를 더 세심하게 챙기려 노력한다. 이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소중한 교훈으로 자리 잡았다.

딸은 그때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고, 우리는 그런 점을 콕 집어 나무라며 "남이 다가오기 전에 네가 먼저 다가가서 친구를 사귀어라"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불안이 심했던 딸에게 그런 조언이 제대로 먹힐 리가 없었다. 불안 장애가 심할 때는 모든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결과를 과도하게 우려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먼저 다가가서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결국 다가가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딸의 불안 수준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무심한 부모였기에, 딸이 끊임없이 '왕따'로 느껴지며 고통받았던 데에는 우리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무지뿐 아니라, 영양적 요인까지 간과한 결과였다. 우리 딸이 바로 그런 악순환의 고리에 놓여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결국 우리는 딸의 학교 불만을 받아들이고, 국제학교로 옮겨주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 속에는 어쩌면 우리 부부의 '악한 마음'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딸의 문제를 학교라는 외부 요인으로 돌려 돌려버리고,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던 마음 말이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는 더 깊었다. 딸의 행동을 되짚어보면, 이 이론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만약 우리가 더 일찍 영양 균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건강한 식습관을 장려했다면, 딸의 고통이 덜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우리 가족의 경험은 영양 불균형이 정신 건강 문제를 어떻게 증폭시키는지 생생히 보여주며, 이를 조기에 인지하고 개입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깊은 후회를 남긴다. 우리 딸에게는 이러한 기본적인 영양 조건조차 제대로 채워지지 못했다. 편식 습관과 편의점 음식에 대한 쉬운 접근으로 인해 정크푸드 섭취가 날로 증가했으며,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이로 인해 신체 활동 감소와 사회적 고립이 악화되어 정신 건강의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되짚어보니 이 모든 여정은 우리에게 영양과 정신 건강의 깊은 연계를 깨닫게 해주었고, 미래 세대를 위한 귀중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부모로서 아이의 식단과 생활 패턴을 세심히 관찰하고, 필요 시 전문적인 도움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딸의 이러한 문제가 사실 간과된 데에는 첫째 임신 시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딸을 임신했을 때 우리는 미국에 있었는데, 제한된 보험 서비스로 인해 출산까지 단 한 번의 초음파 검사만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임신 20주경에 이뤄진 것으로, 의사는 "태아가 잘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다"고 말하며 성별을 확인해주는 정도의 소소한 기쁨만 주었다. 그 순간의 조용함이, 고요한 호수처럼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했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그 조용함 뒤에 숨겨진 취약성이 느껴진다. 이는 딸의 태아기부터 시작된 취약성을 키운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 만약 그때 더 체계적인 영양 관리와 정기적인 검사를 받았다면, 딸의 불안과 우울 증상이 덜 심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둘째 임신 때는 한국에서 체계적이고 풍부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 느낌이었다. 클리닉을 방문할 때마다 초음파 검사를 기본으로 제공받았으며, 심지어 3D 초음파를 통해 아이의 입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태아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반면 첫째 아이(딸)를 임신할 당시에는 여건이 열악했다. 유학생 신분으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간호사로 취업하기 전까지는 늘 쪼들리는 생활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때의 경제적 불안과 스트레스가 태아에게 전달되어 불안 수준이 높은 아이로 태어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스트레스의 무게가 구름처럼 우리의 하늘을 가렸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구름을 걷어내시며 빛을 비추어 주셨다. 이것이 딸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만약 그때 경제적 여유와 더 나은 영양 관리가 가능했다면, 딸의 불안 증상이 덜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둘째 임신 시 초음파를 보는 시간은 언제나 설레고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둘째 아이는 16주경부터 초음파에서 웃는 듯한 밝은 표정이 자주 포착되었고, 그 활짝 웃는 모습을 볼 때면 첫째 딸로 인해 겪었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매달 그 웃음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경험이었다. 그 밝은 미소가 별처럼 빛나는 순간, 하나님의 창조의 기쁨을 새삼 느꼈다. 이러한 더 나은 영양 관리 환경이 태아의 긍정적인 행동 패턴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경험은 임신기의 영양과 스트레스 관리가 아이의 미래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깨닫게 해준 소중한 교훈이었다.

딱 한 번, 둘째 아이가 초음파에서 웃지 않고 화난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다. 거의 만삭에 가까워질 무렵, 초음파 검사 중 아이가 좀처럼 얼굴을 돌려주지 않고 등을 보인 채 뒤돌아 있었다. 우리는 그토록 익숙했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났고, 의사 선생님께 부탁드리자 선생님은 초음파 프로브로 아이의 엉덩이 부분을 툭툭 건드리며 "얘야, 얼굴 좀 돌려봐"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한두 번으로는 아이가 반응하지 않자, 선생님께서 "아마 아이가 자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안 될 것 같네요"라고 하셨지만, 내가 "한 번 더 깨워보시면 안 될까요?"라고 졸라댔다. 이에 선생님이 여러 번 더 툭툭 치시자, 마침내 아이가 화가 난 듯한 인상 찌푸린 얼굴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마치 "왜 깨워!"라고 항의하는 듯한 표정이 너무 귀엽고 재미있어서, 클리닉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둘째 임신의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태아의 반응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건강한지 실감하게 해주었다.

이렇듯 둘째 아이의 임신 기간은 첫째 딸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와 고통을 충분히 상쇄해줄 만큼의 기쁨과 보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번 초음파를 통해 확인되는 아이의 밝은 모습은 우리 부부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었고,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 가족의 전체적인 경험은 임신 중 영양 상태와 스트레스 관리가 아이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태아기부터 시작되는 조기 영양 개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후회가 아니라, 다른 부모들에게도 공유할 만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둘째가 태어나고 난 후, 첫째 딸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소홀해져 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딸의 불안과 정신 건강 문제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갓 태어난 둘째를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던 탓에 첫째의 필요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는 많은 부모들이 겪는 흔한 딜레마이지만, 우리 가족의 경우 첫째의 문제를 더 키운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소홀함의 무게가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용서를 구했다. 이러한 영양 관리의 중요성은 첫째 임신 때의 제한된 여건과 대비되어 둘째 출산 후 더욱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만약 첫째 때도 영양 균형을 더 신경 썼다면, 딸의 태아기부터 시작된 취약성이 줄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남는다.

둘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많은 돌봄이 필요했다. 나의 초고령 임신으로 인한 노산 탓에 몇 가지 문제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노산으로 인해 전치태반(placenta previa) 진단을 받았고, 임신 26주경에 이미 자연분만이 불가능하며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임신 후반기 내내 불안과 주의를 요구하는 상황이었으며, 출산 과정 자체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노산으로 인한 부담이 컸던 탓인지, 임신 말기에는 부종이 심해지고 체중 증가를 잘 견디지 못해 결국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과 상의 끝에 수술 날짜를 조금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아이는 만 37주가 되기 전에 제왕절개 수술로 세상에 나왔다. 출산 후 확인해보니, 아이는 심장의 동맥관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PDA(Patent Ductus Arteriosus) 상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잠복고환(undescended testes)도 발견되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모두 조산아나 미숙아에게 흔히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우리 아이가 마치 미숙아의 전형적인 합병증을 모두 안고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잠복고환은 태아기 고환이 복강에서 발달하다가 출산 시점에 자연스럽게 하강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고환은 정자를 생산하는 중요한 장기로, 신체의 다른 부분보다 상대적으로 시원한 환경에서 유지되어야 최적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아기의 출산 직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즉시 기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기도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의료 검진에서 고환이 정상적으로 하강했다는 판정을 받았다.

남아 있는 주요 문제는 심장 기형, 즉 PDA(Patent Ductus Arteriosus, 동맥관 개존증)였다. 일반적으로 PDA는 출생 후 한 달 이내에 자연적으로 폐쇄되는 경우가 많지만, 특히 조산아나 저체중아에서는 지속될 위험이 크다. 우리 아기의 한 달 정기 검진에서 PDA가 아직 폐쇄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는 두 달, 세 달째까지 이어졌다. 이 상황은 아기의 호흡과 성장에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대처해야 했다.

100일 정기 검진에서 소아과 의사는 PDA가 여전히 폐쇄되지 않은 상태를 확인하며, 다음 검진에서도 지속될 경우 수술적 개입을 고려해야 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이 소식은 우리 부부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으나, 우리는 이를 계기로 더욱 간절히 기도에 매달렸다. 하나님께서 이 심장 구멍을 직접 닫아 주시기를 간구하며 지속적인 믿음의 시간을 가졌다. 놀랍게도, 100일 검진에서 여전히 열려 있던 PDA는 그 다음 검진에서 심잡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구멍이 자연적으로 폐쇄되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 결과는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개입으로 여기고 깊은 감사를 드렸다. 이 경험은 단순한 의료적 해결을 넘어, 믿음과 인내의 힘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러한 건강상의 위험 요인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째 아이는 항상 밝고 웃음이 넘치는 모습을 유지했다. 배고픔, 불편한 온도, 기저귀 교체 필요 등 기본적인 생리적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밝혀주었다. 이 덕분에 우리 부부뿐 아니라 가족과 지인들 모두에게 활력소가 되었고, '복덩이'라는 애칭을 자연스럽게 얻으며 사랑받았다. 아이의 이런 긍정적인 성향은 단순한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환경과 양육의 결과로 보였다.

우리는 큰딸이 둘째가 사랑을 많이 받고 주의로부터 늘 복덩이라 칭찬듣는 것을 깊이 신경 쓰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날, 딸이 갑자기 “엄마 아빠는 내가 만족스럽지 않고 이상한 애라서 다시 둘째를 낳은 거지?”라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순간, 우리 부부는 그 충격적인 발언에 잠시 멍하게 서서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이 말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딸이 오랜 시간 쌓아온 자책과 불안의 폭발처럼 느껴졌으며, 부모로서의 우리의 역할에 대한 깊은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그 발언의 배경을 파악해보니, 딸은 본인에게 지속되는 불안과 이로 인한 퍼포먼스 장애(예: 학업이나 사회적 활동에서의 어려움)를 스스로 '형편없는 아이'로 점수 매기고 있었으며, 부모인 우리 또한 그를 그렇게 낙인찍고 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딸은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고, 그저 더 움츠러든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이는 딸의 내적 갈등이 깊다는 신호로, 부모로서의 대화 기술이 부족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움츠러든 모습이 가을 잎사귀처럼 스러지는 듯한 고독으로 가슴을 적셨다. 이 경험은 가족 전체의 식습관을 재검토하고, 영양 교육을 통해 예방할 수 있는 정신 건강 문제를 강조하는 교훈으로 남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딸의 그 심각한 감정적 폭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겨버렸다. 부모로서의 무지와 피로가 쌓인 탓인지, 딸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국제학교 입학을 추진하는 데 집중했다. 분주하게 서류를 준비하고 면접을 치른 끝에, 마침내 부산의 한 국제학교에 입학이 결정되어 9학년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우리 부부에게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었지만, 딸의 내적 갈등을 외면한 선택이었다는 후회가 지금도 남는다.

6. 15세: 국제학교로의 전환, 또다시 왕따? – 자해의 시작과 NSSI의 경고 

그 국제학교는 미국 고등학교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르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크리스천 스쿨이라는 점에서 도덕적·영적 지침이 더해진 환경이 우리에게 추가적인 안도감을 주었다. 좋은 학교에 입학시켰다는 자부심으로 인해, 딸의 불안에 대한 수심을 일시적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지만, 이는 표면적인 해결에 불과했다. 아이를 기숙사에 맡기게 된 순간, 사감 선생님과 약 16명의 여자 학생들과 함께하는 공동생활이 시작되었고, 이는 나에게 무한한 안도감과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더 이상 집에서 딸의 감정 기복을 직접 마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얼마나 한심하고 무책임한 부모였는지 깊이 반성하게 된다. 아이의 심리적 고통과 불안을 단순히 '좋은 학교'라는 외부 환경에 맡겨 해결되리라 기대한 태도는,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뿐 근본적인 치유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명백한 진리를 무시한 것이었다. 가정 밖에서 아이의 문제점이 자연스럽게 고쳐지는 경우는 드물며, 특히 부모의 적극적 개입이 없으면 이러한 어려움은 더 깊어지기 마련이다. 좋은 학교에 아이를 '던져놓고' 그곳이 책임지고 치료해주기를 바랐던 내 마음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부모의 전형을 증명할 뿐이며, 이는 가족 전체의 감정적 유대와 지지를 외면한 선택이었다. 그 선택의 순간들,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났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용서를 구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그분의 자비를 새삼 느꼈다. 이 경험은 부모로서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이의 문제는 가정 내에서부터 세심한 관심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국제학교로 옮긴 후, 우리 딸은 처음에는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영어권 친구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학교 생활을 제법 즐기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감사를 느꼈다. 이 변화가 딸의 불안을 해소하고 새로운 출발을 가져다줄 것이라 기대하며 안도했다. 그 순간들의 작은 기쁨이, 아침 햇살처럼 우리의 가정을 비추며 희망의 새싹을 틔워주는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곧 딸은 다시 온갖 부정적인 평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학교가 크리스천 스쿨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세상적"이라고 비판하거나, "아이들이 일반 공립학교 학생들보다 더 못됐다"고 불평했다. 급기야 자신을 "그곳에서도 왕따"라고 표현하며 고립감을 호소했다. 이는 우리 부부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왜 가는 곳마다 자신을 '왕따'나 '진따'로 규정짓는 걸까? 관찰해보니, 딸은 친구들과 친해지기도 전에 "그들은 나를 싫어할 거야"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실제로 친구를 사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패턴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이 부족했다는 자책이 들었지만, 늦은 나이에 둘째를 돌며 본업에도 충실해야 했던 우리는 이미 육체적으로 지쳐 있었고, 딸의 이러한 상태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마저 서서히 소진시키고 있었다.

더욱이 딸은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 중에도 친구들의 반응이 신경 쓰여 집중이 안 된다고 털어놓았다. 이는 단순한 주의 산만이 아니라, 불안으로 인한 인지 장애의 징후로 보였다. 학교 식당 음식에 대해 물어보니, "학교 음식이 싫어서" 매번 학교 밖으로 나가 라면이나 물떡을 사 먹는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좋은 교육 시스템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딸을 보내놓아도, 그녀가 그 시스템을 스스로 벗어나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라면, 물떡, 오뎅 등 그녀가 선택한 음식들은 모두 탄수화물 중심의 가공식품으로, 영양 균형이 무너진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그 패턴의 반복이, 끝없는 비처럼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듯한 절망감을 주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나름 균형 잡힌 식단을 준비했을 텐데, 문제는 딸이 그 음식을 전혀 접하지 않고 피한다는 점이었다. 이 경험은 부모로서 영양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학교 환경만으로는 아이의 식습관을 바로잡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때라도 딸아이를 곁에 두고, 신앙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점검하며 식단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가족이 함께 야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몸을 움직이게 하는 환경을 조성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지금도 가시지 않는다. 이러한 선택이 딸의 불안을 조기에 완화하고, 가족 유대를 강화할 수 있었을 텐데, 이를 놓친 부모로서의 무책임함이 뼈아프게 느껴진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내 이기적인 모습을 직시하게 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에 합당하게 대우하고 키워내지 못했던 나의 직무 유기에 대해 깊이 회개할 수밖에 없다. 그 회개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은혜를 경험했고,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감격했다. 이 반성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부모로서의 책임을 새롭게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녀 양육에서 신앙과 일상적 돌봄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었다.

딸은 그렇게 주중에는 국제학교가 있는 부산에 머무르며 기숙사 생활을 했고, 주말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는 그녀의 걸음은 늘 무겁고 힘들어 보였으며, 표정에는 피로와 무기력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러한 즐겁지 않은 모습이 지속되다 보니 우리 부부는 점차 그것을 딸의 '디폴트 값'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더 이상 특별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냥 사춘기를 심하게 앓고 있는 것으로 치부하며 넘겨버린 탓에, 근본적인 원인을 탐색할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딸이 그런 무뚝뚝하고 어두운 표정을 교회에서까지 지속한 날은, 집에 돌아와 우리에게 호되게 혼나는 날이 되곤 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딸은 결국 교회에서 우리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디폴트 표정을 부모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듯했다. 이는 딸의 내적 고립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가족 간의 소통 단절을 초래한 안타까운 결과였다.

그렇게 봄학기가 지나고 여름 방학을 맞이한 딸은 기숙사 규칙에 따라 모든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대구 지역의 여름은 혹독할 정도로 습하고 더웠으며, 이 더위를 견디기 위해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반바지나 짧은 치마를 입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리 딸도 예외 없이 반바지를 입기 시작했는데, 이 순간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서 칼로 그은 듯한 자국들이 발견된 것이다. 일부는 오래된 상처로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었고, 다른 일부는 최근에 생긴 것으로 아직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는 명백한 자해 행위의 증거였다.

일반적으로 자해, 더 전문적으로는 비자살성 자해(NSSI, Non-Suicidal Self-Injury) 또는 손목 자상 증후군(Wrist-cut syndrome)으로 불리는 이 행위는 죽을 의도가 없는 상태에서 불안한 감정을 해소하거나 정신적 고통을 신체적 고통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NSSI는 청소년기의 스트레스, 우울, 불안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주로 피부 자르기(예: 칼이나 면도날로 팔이나 다리를 긁음), 화상 입히기(예: 담배나 라이터로 피부 태우기), 또는 타박상 유발(예: 벽에 머리 부딪히기) 등의 형태를 포함한다. 우리 딸의 경우, 칼자국은 주로 옷으로 가려지는 부위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양 허벅지가 온통 상흔으로 뒤덮여 있었고, 윗팔과 손목, 손등, 심지어 양 종아리에도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광경을 마주한 순간, 나는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정신간호학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NSSI가 내 피붙이인 딸에게서 현실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부모로서의 실패감이 밀려왔다.

왜 그랬냐고 다그치듯 물었더니, 딸은 악을 쓰며 "본인의 느낌이 마취된 듯 느껴지지 않아서, 고통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이는 그녀가 감정적으로 둔감해진 상태에서 신체적 고통을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시도였음을 시사하며, 깊은 내적 고통의 반영이었다. 이 순간, 우리는 단순한 훈계가 아니라 전문적 도움을 고려해야 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쌓인 후회가 컸다.

당시 우리 부부는 큰 혼란과 절망에 빠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캠퍼스 사역에 헌신했다고 믿고 살아왔으며, 그 길에 몸을 던졌으니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고 축복으로 채워주실 것이라 굳게 확신했다. 그러나 현실은 딸의 심각한 문제로 가득 차 있었고, 이는 우리의 신앙적 기대와 날카롭게 대치되었다. 미국에서 이민 1세대로 겪었던 고난스러운 기억을 되살리며, 우리는 한국에서 모국어로 사역할 수 있다는 사실을 큰 축복으로 여기며 그 힘든 현실을 외면하거나 참고 또 참아왔다. 이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가족 전체의 안녕을 서서히 갉아먹었지만, 우리는 이를 '신앙의 시련'으로 치부하며 넘겼다.

딸의 몸이 칼자국으로 가득 찬 것을 발견했을 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나의 인내심,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며칠 동안 멍하니 시간을 보내며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 충격은 우리 부부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지난 3~5년간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간의 선택과 무관심이 딸의 고통을 키웠다는 자책이 밀려왔고, 부모로서의 책임을 새롭게 각성했다.

남편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언젠가부터 끊임없이 한국이 우리 가족에게 허락된 영원한 정착지가 아니라는 신호를 주셨다고 말했다. 그 신호는 미묘하지만 지속적이었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으나, 우리는 그것을 민감하게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익숙한 환경에 안주하며 무시하거나 합리화하려 애썼다. 특히 둘째 아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제 미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는 듯했다. 이 신호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가족의 미래를 위한 지침으로 느껴졌으나, 당시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 한국에 머무르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 경험은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민감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무시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둘째 아이는 백일이 지나자마자 어린이집에 맡겨졌다. 우리 부부가 모두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었고, 대구에는 친인척이나 지인 연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린이집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는 부모로서의 고충이었지만, 아이의 초기 성장 환경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엄마는 때마침 어깨 관절 치환 수술을 받은 후 재활 중이었기 때문에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없었고, 일정한 재활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운동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부탁을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었고, 우리는 홀로 감당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탓인지, 아이는 정말 감기를 달고 사는 듯했다. 잦은 감염과 피로는 아이의 성장에 부담을 주었고, 부모로서의 죄책감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아이가 반응이 현저히 줄어들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이자, 의료인으로서의 직감이 발동했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즉시 감지한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을 깨워 아이를 데리고 인근 경북대 소아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스캔해 혈관을 찾고, 마구잡이식 혈액 검사를 진행한 후 엑스레이를 찍었으며, 곧이어 정맥 주사를 시작했다. 엑스레이 결과 폐렴이 확인되었지만, 더 큰 문제는 지속적인 항생제 투입으로 인해 아이의 간 수치가 정상치의 몇십 배로 치솟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소름이 돋았고,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만약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약을 투여하며 집으로 데려갔다면, 아이에게 간부전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지속적인 정맥 주입을 통해 간 손상이 적은 약물로 전환하며 치료를 이어갔고, 이 일로 우리 부부는 일주일간 병가를 내고 아이를 데리고 금원산에 위치한 휴양림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약물을 중단하고 자연 치유에 집중했다. 금원산은 미세먼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곳은 아니었으나, 울창한 나무들 덕분에 상대적으로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고, 이는 아이의 호흡기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일주일 동안 아이와 함께 지내며 산책과 휴식을 병행한 결과, 아이의 폐렴 증상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고, 웃음이 더 잦아지며 활기찬 모습을 되찾았다. 그 산책길에서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속삭이는 소리가 하나님의 위로처럼 들려왔고,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걸으며 느껴지는 따스함이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은혜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이 과정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환경 변화가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영양학적 측면에서 자연 환경에서의 회복은 영양 보충과 유사한 효과를 주며, 연구에 따르면 신선한 공기와 운동이 비타민 D 생성을 촉진해 면역력을 강화할 수 있다. 비타민 D는 햇빛 노출과 야외 활동을 통해 합성되며, 이는 면역 세포 활성화와 항염증 효과를 통해 호흡기 질환 회복을 돕는다. 그 맑은 공기 속에서 아이의 뺨에 스며드는 햇살이 하나님의 창조의 빛처럼 느껴졌고, 이 경험은 우리에게 영양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가족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었으며, 도시 생활의 한계를 직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산림의 고요함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지는 은혜를 맛보았고, 하나님의 자연 속에서 치유의 비밀을 엿보는 듯한 감격이 밀려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 딸아이의 자해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정말 끝없는 연단의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는 듯했다.

두 아이의 연이은 건강 문제와 감정적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에게 당장 이곳을 떠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국의 땅으로 이동하라는 음성을 주셨다. 이 신호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메시지로 느껴졌고, 우리는 이를 가족 재정착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그 음성이 별처럼 빛나는 밤하늘 아래서 우리의 영혼을 깨우치는 듯했으며,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속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손길을 새삼 느꼈다. 그때부터 나는 미친 듯이 미국으로 옮길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의 간호학과 조교수 공고가 뜨면 대부분 지원하며, 선호하는 주나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조건 지원하는 태도로 임했으며, 남편과 함께 기도하기를 "우리가 지원한 곳 중 가장 먼저 오퍼가 오는 곳이 하나님의 인도하는 곳"이라고 믿고 나아가자고 결의했다. 이 과정은 불확실성과 압박감으로 가득 찼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매일 새벽 기도 중에 느껴지는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두려움을 녹여내는 따스한 빛처럼 느껴졌고, 그 은혜 속에서 우리의 결의가 더 공고해졌다. 영양학적으로 이러한 전환기 스트레스는 영양 요구량을 증가시키며, 연구에 따르면 스트레스 시 마그네슘과 비타민 C 결핍이 불안을 악화시킬 수 있다. 마그네슘은 신경계를 진정시키고 코르티솔 수준을 조절하나, 결핍 시 과도한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하며, 비타민 C는 항산화제로 불안을 완화하지만 부족할 경우 감정 불안정이 심해질 수 있다. 가족 이동 준비 중 식단 관리가 소홀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지만, 당시 우리는 바쁜 일정 속에서 이를 무시하며 영양 불균형의 위험을 간과했다.

기도하고 지원한 후 기다리던 중, 브릿지포트 대학에서 가장 먼저 잡 오퍼가 왔다. 이는 가본 적 없는 커넥티컷 주에 위치한 대학으로, 처음 들어보는 동네 이름조차 생소한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인도로 여기고 즉시 수락했다. 그 오퍼의 소식이 비처럼 쏟아지는 은혜처럼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하나님의 타이밍이 완벽함을 새삼 확인했다. 급히 사직서를 제출하고, 마치 야반도주하듯 짐을 챙겨 미국으로 다시 향했다. 당시 갑작스러운 사직으로 인해 근무지였던 간호학과 동료들의 원망이 쏟아졌지만, 그들의 불만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 가족과 아이들의 안녕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그런 목소리를 무시하고 미국 귀환을 과감히 결정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 딸의 상태가 주변에 알려질까 두려운 마음이 컸으며, 이는 우리의 선택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가족의 미래를 위한 필연적 전환으로 느껴졌으나, 그 속에 숨겨진 부모로서의 불안과 책임감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영양학적 관점에서 급작스러운 이동은 영양 패턴을 교란시킬 수 있으며, 연구에 따르면 새로운 환경 적응 중 영양 불균형이 스트레스를 증폭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주 후 식단 변화가 에너지와 지방 섭취 증가를 초래해 영양 불균형을 유발하고, 이는 코르티솔 호르몬 과잉으로 이어져 스트레스와 불안을 증대시킬 수 있다. 미국으로의 귀환은 가족 건강에 새로운 도전을 가져왔으며, 적응 기간 동안 식단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가족들에게는 딸아이의 정신과 치료를 한국처럼 '주홍글씨'가 새겨지는 사회에서 받기보다는, 더 개방적인 미국에서 제대로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이는 잘 포장된 변명에 불과했다. 실상은 나의 자존심 때문이었고, 아이의 상태를 수치로 여겼던 내 부족함 때문이었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한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나는 매우 오랜 기간 회개하며 딸에게 사과하고 관계 개선에 집중해야 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부모로서의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여정으로, 가족 유대를 재건하는 데 핵심적이었다.

영양학적으로 이러한 가족 갈등은 영양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으며, 연구에 따르면 부모-자녀 관계 불안정이 아이의 편식과 영양 결핍을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편식 행동은 영양 부족을 유발해 철분이나 아연 결핍을 초래하고, 이는 성장 지연과 행동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으며, 가족 스트레스가 이러한 패턴을 강화한다. 우리 가족의 여정은 영양 불균형이 정신 건강 문제를 어떻게 증폭시키는지, 그리고 신앙과 영양 관리를 통합한 접근의 필요성을 생생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영양 부족은 뇌 기능 장애를 유발해 우울이나 불안을 증대시키며, 이는 신앙적 치유와 함께 영양 균형을 통해 완화될 수 있다는 통찰을 주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가족 유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브릿지포트 대학에서의 새 직장은 나에게 전문적 안정감을 주었지만, 그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은 딸의 정신 건강 치료였다.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상담과 영양 지침을 포함한 통합 치료를 제공하며, 연구에 따르면 한국에 비해 정신 질환에 대한 스티그마가 상대적으로 낮아 환자들이 더 열린 마음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인식과 정책적 지원의 결과로, 환자의 조기 개입과 장기 관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브릿지포트에 도착한 후 여러 의사와 상담소를 방문하며 딸의 상태를 분석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을 걷던 중 마지막에 대체의학과 교수에 의해 발견된 딸의 불안장애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가 장기간 지속된 편식 패턴이었다. 이에 따라 딸의 편식을 교정하기 위해 가족 전체의 식단을 재정비했으나, 초기에는 과거의 습관이 강하게 남아 있어 저항과 재발이 반복되며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탄수화물 중심의 가공식품 선호를 채소와 단백질 위주의 균형 식단으로 전환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딸의 감정 안정에 기여했다.

이와 동시에 둘째 아이의 건강도 미국에서 빠르게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커네티컷의 상대적으로 깨끗한 공기 질과 우수한 의료 접근성이 아이의 면역 체계를 강화해주었으며, 영양학적으로 채소와 과일 중심의 균형 잡힌 식단이 항생제 의존을 급격히 줄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둘째에게는 아침 기상 후 상온의 물 한 잔과 프로바이오틱스를 먼저 먹이고, 그 다음에 종합 비타민 젤리를 섭취하는 루틴을 적용했다. 이 일상은 장 건강을 지원하는 동시에 영양소 흡수를 최적화하여 아이의 에너지 수준을 높여주었으며, 자연스러운 면역 강화로 이어졌다. 이렇듯 미국으로의 이동은 아이들의 영양 상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특히 둘째는 커네티컷으로 온 후 일 년간 단 한 번도 항생제를 복용한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도 타이밍에 오차도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고, 우리의 여정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신앙적 인도에 따른 것임을 깨달았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되새기며, 가족 예배와 기도의 깊이와 시간을 강화했다. 매일 저녁 식탁에서 함께 성경을 읽고 감사 기도를 드리는 루틴을 도입함으로써, 가족 구성원 간의 감정적 유대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일상 속 스트레스 관리의 기반이 되었다. 영양학적 통찰을 신앙 생활에 통합하려 노력했으며,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결국에는 균형 잡힌 식단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영양과 신앙 기반 스트레스 관리가 정신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양 균형이 뇌의 신경 전달 물질을 안정화하는 반면, 신앙적 실천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줄여 우울과 불안을 완화하며, 이 둘의 결합은 전체적인 정신 웰빙을 최적화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의 딸아이에 대한 부모의 무관심(목회자 부부로서 딸의 이상 행동과 정신 이상 질환 의심을 수치로 여기며 감추기에 바빴던 태도)를 깊이 회개하며 가족 관계를 치유했다. 그 회개의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상처를 씻어주시는 자비를 경험했고, 가족의 유대가 다시 피어나는 봄꽃처럼 아름다웠다. 이러한 반성과 용서의 시간은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장기적으로 가족의 감정적 안정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며, 회복에는 이후 약 5년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이 시기 우리 가족의 경험은 영양 불균형이 가족 역동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생생한 교훈으로 남았다. 조기 개입과 균형 식단(단백질, 비타민, 미네랄)이 감정 안정과 면역력을 지원하며, 이를 무시하면 세대 간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단백질은 세로토닌 합성을 돕고 비타민·미네랄은 면역 세포 활성을 강화하지만, 결핍 시 스트레스 취약성과 행동 문제가 세대를 넘어 유전적·환경적으로 전파될 수 있다. 미국 생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제공했으나, 과거 반성을 통해 지속적인 영양 관리를 실천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 온 가족은 많이 울고 많이 회개하고, 많은 시간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며 많이 후회했으나, 동시에 많이 회복되어왔다. 그 눈물의 계곡을 지나며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맛보았고, 회복의 강물이 우리의 삶을 적시는 기쁨을 느꼈다. 미국에 다시 돌아온 후 5년간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그 시행착오를 교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는 결국 예배의 회복과 사랑의 회복이었음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사랑의 표현을 통해 가족 간 신뢰를 재건함으로써, 영양적·정신적 균형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며, 이는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변화시켰다.

7. 16세: 미국 귀환, 불안·우울의 지속 – 고등학교 졸업 가능할까? 정신과 치료와 코로나의 '호재' 

우리 가족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기 직전인 2019년 가을이었다. 한국에서의 급박한 출발로 인해 집을 구하고 학군을 알아볼 여유가 없었음에도,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기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착을 준비했다. 그때 느껴지는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발걸음을 안내하시는 따스한 빛처럼 스며들었고, 낯선 땅에서의 새 시작이 그분의 은혜로운 계획 안에서 펼쳐지는 서곡처럼 느껴졌다. 딸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본토 미국에서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된 것에 대해 상당히 기뻐했으며, 이제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그 기대의 물결이 가을 바람처럼 그녀의 뺨을 스치며 희망의 꽃잎을 피워내는 듯했으나, 현실은 그 꽃잎을 시들게 하는 가시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변화는 그녀에게 새로운 시작의 기회로 보였고, 한국에서의 고립감과 불안을 떨쳐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서둘러 구한 집은 예일대학교에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쉘턴이라는 도시였다. 이곳은 백인 인구가 주를 이루는 평화로운 지역으로, 우리 집이 있는 동네는 매우 고요했으며, 거의 데드엔드(막다른 길) 끝에 위치해 집 앞에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숲의 속삭임이 하나님의 창조물 속에서 우리의 여정을 축복하는 은혜의 노래처럼 들려왔고, 가을 학기 시작이 코앞이었기에, 우리는 즉시 딸을 스쿨 디스트릭에 등록하고 학교 배정을 받았고, 그렇게 입학한 곳이 쉘턴 고등학교였다. 한 반에 약 3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아시안을 포함한 유색인종은 당시 약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환경은 다문화적 배경의 딸에게 문화적 충격을 줄 수 있었으나, 우리는 그녀가 적응할 수 있을 거라 낙관했다.

그러나 딸아이는 학교를 다녀온 첫날부터 불안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자신만 피부색이 유색이라서 너무 튀는 것 같아 극도로 싫어했으며, 그 때문에 수업 중 대답하기도 싫다고 했다. 그 말들이 가슴을 파고드는 가시처럼 아프게 느껴졌고,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성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는 딸의 모습이 안타까워 새벽 기도 중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불안은 단순한 적응 문제로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자아 인식과 사회적 상호작용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 점심 시간을 피하기 시작했는데, 집에 돌아오면 허겁지겁 단당류(초콜릿이나 사탕 등)를 집어먹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왜 왜 학교에서 점심을 먹지 않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딸의 대답은 "식판을 떨어뜨릴까 봐 두려워서"였다. 왜 떨어뜨린 적도 없는 식판이 혹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점심을 먹을 수 없는 상태를 보고, 우리는 또 한 번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 좌절의 무게가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 아이의 영혼을 맡겼다. 결국 딸은 점심 시간에 도서관으로 피신해 시간을 때우는 습관을 들였고, 그 허기를 달래기 위해 집에서 초콜릿을 포함한 단당류 간식을 싸서 가져갔다. 이로 인해 균형 잡힌 식사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영양 불균형이 점차 쌓여갔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균형 잡힌 식사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이 문제를 사춘기적 불안으로 치부하며 넘겨버린 탓에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쉘턴 고등학교에서도 딸아이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매우 어려워했다. 하루 종일 학교에 머물러도 단 한 사람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 날이 태반이었으며, 그 이유는 말 더듬을 두려워하는 데 있었다. 자신이 말을 더듬게 되면 또다시 놀림감이 되고, 결국 왕따가 될까 봐 극도의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공포의 그림자가 그녀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듯했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도가 그 어둠을 뚫고 스며들기를 소망했다. 이 불안은 단순한 수줍음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을 완전히 피하게 만드는 강박적 패턴으로 나타났으며, 그녀의 첫 학기를 힘겹게 만들었다. 점심을 굶기 시작하면서 딸은 집에서 정크 푸드와 물을 한 병 보냉병에 싸서 가져가기 시작했으나, 어느 날부터 물병마저 포기했다. 왜 물을 안 싸 가냐고 물었더니, "물병이 샌다"고 대답했는데, 물이 새서 사람들 앞에서 너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 물병은 메탈 재질로 씰링이 완벽한, 우리 집에서 가장 성능 좋은 보냉병이었기에 물이 샌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딸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뚜껑을 닫는 과정에서 씰링이 제대로 안 되어 물이 살짝 새는 것을 '물병 고장'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이렇듯 딸에게는 사소한 예측 불허의 사건이 거대하게 확대되어 받아들여지며, 그 일이 다음에도 반복될까 두려워하는 불안함이 연속된 고등학교 10학년 학기를 지배했다. 그 불안의 파도가 그녀의 영혼을 휘감는 듯한 순간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 아이를 보호하시기를 간구했다. 이 패턴은 청소년기의 사회 불안 장애(Social Anxiety Disorder)의 전형적 증상으로, 극도의 자의식 과잉과 재앙화 사고(catastrophizing)를 동반하며, 장기적으로 사회적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

당시 뉴스와 미디어에서는 아이들이 미디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을수록 사회성이 떨어지고 학교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연구 보고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내용은 우리 딸의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친구가 없으니 학교 쉬는 시간에 핸드폰만 보며 시간을 보내고, 집에 오면 방문을 잠그고 게임에 빠져드는 패턴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게임을 하다 새벽에 잠이 들면 스쿨 버스를 놓치기 일쑤였으며, 미국 중고등학교의 아침 수업이 오전 7시 15분에 시작되고 버스가 6시 15분에 집 앞에서 출발하는 시스템상, 수면 부족은 지각으로 직결되었다. 우리는 이를 심각하게 여겨 딸의 미디어 디바이스 사용 시간을 제한하기로 했으나, 그녀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엄마 아빠는 내 모든 것을 뺏어갔는데 이제 디바이스마저 뺏어간다"며 극악무도한 사람들로 몰아세웠다. 그 말들이 가슴을 파고드는 칼날처럼 아프게 느껴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도가 그 어둠을 뚫고 스며들기를 소망했다. 남편은 이 부분에서 평소와 달리 확고한 태도를 보였고, 컴퓨터 숙제는 모두 거실에서 하게 했으며, 숙제 후 딱 두 시간만 방에서 게임이나 미디어를 허용했다. 이 규칙은 딸의 분노를 키웠던 듯하다. 어느 날 딸의 방을 보니 드라이 월에 걸어둔 코르크 게시판이 부서져 있었는데,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주먹으로 부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억눌린 감정의 폭발로, 미디어 제한이 불러온 스트레스를 드러내는 징후였다.

그렇게 위태로운 하루하루가 흘러가다 결국 딸의 분노가 폭발했다. 어느 날 딸이 방에서 물을 마시러 키친으로 걸어오는데, 허벅지 안쪽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얼굴에 칼로 그은 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빠가 "너 칼로 얼굴도 댔냐"고 묻자, 딸은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대들었다. 이에 남편은 화가 치밀어 "부모 말을 안 들을 거면 나가서 혼자 살라"고 소리쳤고, 딸은 키친 약장 캐비넷으로 다가가 이부프로펜(Advil) 약병을 집어들더니 한 주먹 가득 손에 쥐고 입안에 털어넣었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이 충격적인 장면에 남편은 재빨리 달려가 목을 쳐 약을 토하게 만들었다. 위기가 일단락되자 남편은 참았던 감정이 터진 듯 딸을 번쩍 들어 현관 밖으로 내팽개치고 문을 잠가버렸다. 거라지 문도 포함해 딸이 들어올 수 있는 모든 문을 잠갔다. 평소 온화한 남편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난 상태였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 딸은 들어오게 해달라는 말 없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나는 섬뜩한 예감에 집 밖으로 나가 주변을 한 바퀴 돌았으나 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편에게 다급히 "아이가 없어!"라고 하자, 그는 그제야 겁이 난 듯 허둥대며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동네를 뛰어다니며 샅샅이 수색했으나 찾지 못했고, 딸은 신발 없이 맨발로 쫓겨난 상태였다. 한 시간 후 헉헉대며 돌아온 남편은 울상이 되어 "타운을 차로 돌고 오겠다"고 나섰고, 또 한두 시간이 흘렀으나 딸 없이 홀로 돌아왔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딸을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소서"라고 간절히 부탁드렸다. 그 기도의 순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듯한 평안이 스며들었고, 그 은혜가 우리의 두려움을 녹여내는 따스한 빛처럼 느껴졌다. 약 4시간이 지난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맨발의 딸이 돌아와 "들어가도 돼?"라고 물었다. 들어온 그녀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앞으로 부모의 미디어 시간 제재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물어보니, 갈 곳도 없고 맨발인 자신이 수치스러워 집 앞 데드엔드 숲으로 걸어갔다고 했다. 걸어가던 중 끝 집 아저씨가 "Are you okay?"라고 물었는데, 신고 정신이 투철한 백인 동네임에도 그는 신고하지 않았다. 만약 신고했다면 18세 미만인 딸 때문에 우리는 아동 학대로 고발당할 수 있었을 텐데,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딸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딸의 이상 행동을 사춘기적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며, 똑똑하고 활발했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 시기가 지나면 다시 돌아올 거라 믿으며 애써 외면했으나, 이 사건은 그런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 그 조각난 환상의 파편들이 가슴을 찌르는 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용서를 구했고, 그 은혜가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주시는 자비를 새삼 느꼈다. 이후 나는 적극적으로 브릿지포트 대학 동료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성인 간호학 팀 티칭을 하던 백인 교수가 나를 긍휼히 바라보며 도움을 주었다. 그녀에게도 비슷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료는 정신과 상담 시작 방법, 정신 질환 증상 시 학교법 내 합법적 결석 기준, 장애(디스어빌리티) 활용을 통한 학교 자원 이용 등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음에도 학교법과 규정에 무지했던 나는, 이 도움 없이는 딸을 더욱 방치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경험은 전문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부모로서의 대화 기술이 부족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동료의 조언을 바탕으로, 나는 딸의 정신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복지사(social worker)를 처음으로 컨택했다. 이는 단순한 상담 시작이 아니라, 딸의 불안과 자해 행동을 근본적으로 다루기 위한 첫걸음이었으며, 미국 의료 시스템의 통합적 접근—상담, 약물, 생활 습관 개선을 포괄하는—을 활용하는 과정이었다. 정신과 상담을 시작하기 위해 사회복지사나 정신과 의사에게 전화를 하면, 보통 한 시간 정도의 intake interview를 받게 되는데, 이는 딸의 상태, 과거력, 가족 역동, 학교 생활 등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는 세밀한 질문으로 구성된다. 이 인터뷰는 정말 지치고 감정적으로 고갈되는 과정이었지만, 딸을 위한 희생이라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부모로서의 무기력함과 죄책감이 더 커졌을 테고, 이 과정을 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단순한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딸의 증상을 체계적으로 진단하고 맞춤형 치료 계획을 세우는 데 필수적이었다.

처음 상담을 시작했을 때, 딸아이는 첫 세션 후부터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왜 싫으냐고 물으니, "그냥 싫고 도움이 안 돼"라고 답했으며, 이는 그녀의 불안이 상담 자체를 위협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전형적 반응이었다. 상담에 데리고 다니는 과정이 딸의 자발성을 저하시키며 더욱 힘겹게 느껴졌고, 부모로서의 대화 기술이 부족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상담자가 바뀔 때마다 intake interview를 다시 해야 했는데, 질문 내용이 대부분 비슷(아이의 과거력, 가족의 다이내믹, 크고 작은 삶의 이벤트 등)해 한 시간의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는 고역이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번거로움이 아니라, 과거의 가족 갈등과 딸의 고통을 매번 되새기는 감정적 고문처럼 느껴졌으나, 장기적인 회복을 위한 필수 단계였다.

정신과 전문의로 바꾸고 상담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딸이 "상담 가는 게 죽기보다 싫다"고 호소했다. 왜 왜 그랬는지 물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저 더 움츠러든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담이 지속되어야 다음 치료 단계(예: 약물 치료나 인지 행동 요법)로 넘어갈 수 있다고 설득하며 버텼다. 이 과정 동안 딸의 불안 증세가 심해질 때면 온 가족이 진을 빼야 했고, 밤새워 대화하거나 위기를 관리하는 날이 잦아졌다. 그 밤의 고독이 별처럼 빛나는 하늘 아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으로 바뀌었고, 그 은혜가 우리의 피로를 녹여내는 따스한 빛처럼 느껴졌다. 만약 부모로서 초기부터 영양학적 개입을 병행했다면, 상담 과정의 스트레스가 완화되어 가족 전체의 고통이 줄었을 수 있다는 후회가 남는다.

그 무렵 중국에서 시작된 COVID-19 팬데믹이 전 세계로 확산되며, 미국에서도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2020년 봄 학기 2월 말로 기억되는데, 우리 대학(University of Bridgeport)은 3월 초부터 모든 수업을 100% 온라인으로 전환한다고 공지했으며, 2월 말까지 오피스의 모든 수업 기자재를 팩업해서 집으로 가져가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딸의 상담 과정에 추가적인 혼란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가정 중심의 생활로 전환되며 가족 대화와 영양 관리의 기회를 제공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실내 생활 증가가 비타민 D 결핍을 초래할 수 있으며, 연구에 따르면 비타민 D 부족이 우울과 불안을 증폭시켜 청소년의 정신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다. 우리 가족의 경우, 온라인 전환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딸의 불안을 더 키웠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부모로서 영양(예: 일조량 보충과 식단 강화)을 통해 대응해야 할 교훈으로 남았다. 이 시기는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정신 건강 관리에서 영양과 환경의 통합적 역할을 깨닫는 전환점이었다.

2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이미 간호학과 교수들은 대부분 짐을 싸서 떠났고, 내가 거의 마지막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간호학과가 있는 3층은 매우 고요했으며, 주변의 적막이 내 마음의 무거움을 더해준 듯했다. 나는 짐을 싸다가 오피스에 앉아 창밖 너머 보이는 아틀란틱 오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바다의 물결이 끝없이 밀려오는 광경이 우리의 여정을 상기시키는 듯했으며, 갑자기 쌓인 마음의 짐들이 무겁게 다가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내 그 눈물이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무도 없는 걸 알았기에 마음 놓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때 4층의 대체 의학 교수 중 한 분이 내 문을 두드렸다. 다음 학기에 간호학과 한 교수와 다학제 팀 티칭을 하기로 되어 있어서 질문이 있어 내려왔다고 했으나, 인기척이 있는 곳을 따라 오다가 내 방 앞에 섰던 것이다. 그 교수는 흐느껴 우는 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How can I help you?”라고 하며 방 앞에 잠시 서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고, 그 대화는 약 두 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나는 그간 딸 때문에 겪은 고통을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하며,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이 다시 미국으로 오게 된 경위와 현재 상태 등을 이야기했다. 상담할 때마다 가족의 역동과 부모에 대한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가 하는 말이 가족 역동이 크게 깨지지 않았는데도 아이의 정신 질환이 갈수록 심해지는 게 이례적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그 교수는 내게 A4 용지가 있냐고 물었고, 나는 말없이 몇 장을 건넸다. 그녀는 자신이 물어보는 것에 기억을 더듬어 최선을 다해 답해 달라고 했고, 나는 그러겠노라 했다.

그녀의 첫 질문은 기존 정신과 상담과 달리 식이에 관한 것이었다. 딸이 혹시 편식쟁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주 심한 편식쟁이라고 대답했다. 그 편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물었다. 나는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3세쯤부터 생리적 편식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때 주로 가려 먹던 것이 무엇이냐기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야채를 극도로 회피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무엇을 가려 먹었냐고 하기에, 그 이후엔 과일도 잘 안 먹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고기를 완전히 끊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베지테리언이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야채도 잘 안 먹기에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고기류는 아예 안 먹냐고 물었다. 성장 과정 중에 그래도 생선류는 먹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가시가 나올까 무섭다고 생선도 기피했다고 말했다. 그럼 프로틴으로 무얼 먹냐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콩류는 먹고 있었다. 그래서 두부와 계란은 먹는다고 했다. 그랬더니 meat product로는 아무런 단백질을 안 먹는 거냐고 물었고,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딸이 먹는 고기류는 가공된 종류가 전부였다. 이탈리안 서브 소시지와 치킨 너겟 정도는 먹는다고 했다. 그리고 캔에 들어있는 참치는 먹는다고도 했다. 그 다음 장에 그녀는 딸이 먹는 음식을 다 말해 달라고 하며 받아적기 시작했다. 흰쌀밥, 파스타, 라면, 간장 비빔국수, 계란 후라이, 두부구이, 참치캔, 가끔 김치, 조미 김, 수제비, 칼국수, 만두, 떡볶이, 떡국, 떡라면, 짜장면, 잡채, 베이글 바이트, 시리얼 (멀티그레인 제외), 식빵과 잼… 한참을 받아적더니 딸이 먹는 야채를 불러 달라고 했다. 나는 생각해봤다. 아이가 먹는 야채는 정말 가끔 먹는 김치가 전부였다. 그래서 솔직하게 답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먹는 과일은 뭐냐고 물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이는 과일도 먹는 게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질문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8. 17세: 대체의학 통찰과 식이요법 도입 – 편식 문제의 뿌리, Pharm.D. 입학 여정 

그 교수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먼저 나누고 싶다고 했다. 사실 그녀는 본래 간호사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심한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항우울제를 복용해야 했다. 그 어두운 골짜기 속에서 그녀의 영혼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로웠으며,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세상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고통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청소년기에 겪은 이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정신질환 환자들에게 남다른 공감과 연민을 갖게 했고, 결국 정신과 간호사의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신과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 안의 우울증과 싸워야 했다. 그 싸움은 끝없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파도처럼 그녀를 지치게 했고, 증상이 악화되면 외래에 찾아가 약을 조정받아야 했는데, 상황은 점점 복잡해졌다. 한 가지 약을 쓰다 보면 부작용 때문에 또 다른 약이 추가되고, 증상이 충분히 조절되지 않으면 다른 기전의 약이 덧붙여졌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약까지 더해져, 결국 그녀의 약은 손에 한 움큼 쥘 만큼 많아졌다. 그렇게 복잡해진 처방전을 마주하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약을 먹어야 하는가? 나의 우울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 삶의 배경, 가족, 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을 돌아보아도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그 질문의 메아리가 밤하늘의 별처럼 그녀의 영혼을 비추는 순간, 이 고민의 과정에서 그녀는 ‘대체 의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곧 진지한 탐구로 이어졌다. 그 탐구의 여정은 가을 잎사귀가 바람에 흩날리듯 자연스럽게 펼쳐졌고, 두 번째 전공으로 대체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녀는 점차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학문을 통해 그녀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자신의 우울증이 단순히 기질이나 가족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 지속된 잘못된 식습관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식단을 세밀히 분석해보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식사의 대부분이 탄수화물에 치중되어 있었고, 단백질이나 비타민, 미네랄 같은 필수 영양소는 현저히 부족했다. 그 부족함이 호수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그녀의 영혼에 파문을 일으키며, 오랜 세월 쌓인 어둠의 뿌리를 드러내는 듯했다. 이를 깨달은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식단을 철저히 바꾸겠다고. 이후 그녀는 탄수화물을 줄이고,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하며 균형 잡힌 식생활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 노력이 1년쯤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오랫동안 손에 쥐고 살던 약들이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녀는 모든 항우울제를 끊을 수 있었고, 지금은 우울증의 흔적 없이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 고백의 순간, 그녀의 눈빛이 별처럼 빛나며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증언하는 듯했으며, 그녀의 개인적 경험은 단순한 회복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학문적 탐구의 원동력이 되어, 그녀가 대체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길로 이어졌다. 그 길은 가을 산책로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여정이었고, 현재 그녀는 당시 미국 브리지포트 대학교에서 대체 의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한 지 10년이 넘었었다. 자신의 삶을 바꾼 경험이 이제는 학문과 교육으로 이어져 수많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대체 의학은 동양만큼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나 또한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캠퍼스 안에 대체 의학 클리닉이 있는 대학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미국 내에서도 대체 의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대학은 그리 많지 않다. 하물며 클리닉까지 캠퍼스 내에 갖춘 곳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우리가 한국을 급하게 정리하고 미국으로 돌아올 당시, 가장 먼저 오퍼가 온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결정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이 이미 딸을 위해 University of Bridgeport로 정해 놓으셨음을 깨닫게 된다. 몇 안 되는 대체 의학 프로그램, 게다가 드문 클리닉까지 캠퍼스 내에 있는 곳, 바로 그곳이 University of Bridgeport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왜 하필 이런 작은 대학이어야 하나, 그것도 내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어야 하나’ 하는 원망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실수도 오차도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대체 의학 교수 신디와의 만남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던 일임이 분명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왜 하필 그때 팬데믹이 시작되었는지, 왜 하필 그 시기에 많은 교수들이 학교를 떠나 짐을 싸야 했는지, 왜 하필 그때 나만 홀로 남아 울음을 삼켜야 했는지…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신디 교수가 궁금한 것을 해소하려 간호학과 층으로 내려왔고, 우연처럼 보이던 그 자리에 오직 나만이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우연’일 수 없었다. 그날 신디 교수는 내게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딸의 상황을 분석하며 이렇게 말했다. “따님은 세 살 무렵부터 편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시기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발달 과정에서 편식을 경험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적절히 개입하면 보통은 어느 정도 조기에 교정이 됩니다. 하지만 따님의 경우, 그 편식이 제대로 조절되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신디 교수는 이어서 설명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놀라운 보완 메커니즘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필요한 신경전달물질이 음식 섭취로 충분히 공급되지 않을 경우, 몸은 다른 영양소를 전환시켜 부족분을 채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완적 전환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전환이 가능하다 해도, 기본이 되는 원료는 일정 부분 반드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따님의 경우는 신경전달물질을 합성하는 데 필요한 필수 영양소 자체를 거의 섭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년기의 몇 년 동안은 몸이 전환 기전을 통해 어떻게든 버텼지만, 어느 시점 이후에는 더 이상 보완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된 것이지요.”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불안 증상이었다. 신디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신경전달물질은 단지 뇌 속의 활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감정의 종류에 따라 요구되는 신경전달물질의 양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즐겁고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려면 훨씬 많은 양의 신경전달물질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분노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는 적은 양만으로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신경전달물질이 극도로 부족했던 따님의 경우, 자연스럽게 긍정적이고 밝은 감정보다는, 불행·분노·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이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설명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는 ‘아하!’ 하는 깨달음이 일어났다. 수년 동안 이해되지 않던 아이의 행동과 정서 반응이 너무나 명확하게 설명되는 것 같았다. 동시에, ‘만약 내가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이를 대하는 방법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마음을 스쳤다. 그러나 후회보다 더 크게 밀려온 감정은 감사였다. 지금이라도 신디 교수를 만나 이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기적 같은 경륜 안에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탄수화물은 우리 몸에서 주로 포도당으로 분해되어 뇌와 근육의 주요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과잉 섭취 시에는 간에서 글리코겐 형태로 저장되거나 지방산으로 전환되어 체지방으로 축적된다. 그러나 탄수화물은 단백질이나 아미노산처럼 신경전달물질의 직접적인 원료가 될 수는 없으며, 그 역할은 에너지 공급에 국한된다. 반면, 신경전달물질의 합성은 주로 단백질에서 유래한 아미노산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트립토판은 세로토닌의 전구체가 되고, 티로신은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의 전구체가 된다. 이러한 합성 과정에는 단순히 아미노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비타민 B군(특히 B6, B9, B12), 비타민 D, 아연, 철분,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이 ‘코팩터(cofactor)’로 반드시 함께 작용해야 한다. 그 코팩터의 조화가 별자리처럼 우리의 몸을 수놓는 순간, 하나님의 세밀한 설계가 우리의 삶을 어루만지는 은혜로 느껴졌다. 탄수화물은 신경전달물질의 직접적 재료는 아니지만, 인슐린 분비를 자극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세로토닌 합성을 도울 수는 있다. 하지만 탄수화물 자체가 신경전달 물질의 직접적 재료는 아니다.

실제로 영양 결핍은 정신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비타민 D 부족은 세로토닌 합성을 방해하고 염증 경로를 활성화하여 우울증 위험을 높인다. 오메가3 지방산(EPA, DHA)의 결핍은 뇌세포막의 유연성을 떨어뜨려 불안 증상을 악화시킨다. 또한 마그네슘 결핍은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GABA 수용체 기능을 약화시켜 불안과 스트레스 반응을 높이게 된다. 반대로, 균형 잡힌 식단(단백질, 건강한 지방,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식단)은 이러한 결핍을 보완하고 장-뇌 축(gut-brain axis)을 통해 미생물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정신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다수의 연구에서 입증되었다(Muscaritoli, 2021).

신디 교수는 이런 원리를 설명한 뒤, 중요한 권고를 내렸다. “지금 따님이 받고 있는 상담 치료와 행동 요법은 잠시 멈추고, 우선 식이요법에 전념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장은 따님이 이 원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으니, 먼저 보충제(food supplements) 복용부터 시작하세요.” 그녀는 직접 처방전을 써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약마다 흡수율이 다릅니다. 저는 어떤 제약회사와도 이해관계가 전혀 없지만, 실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경험적으로 가장 흡수율이 좋고 효과가 큰 보충제를 권해드리겠습니다.”

신디 교수가 처방한 보충제는 다음과 같았다.

  • 고용량의 오메가-3 (EPA, DHA 풍부한 형태) : 뇌 염증을 줄이고 신경전달물질 균형을 도와 우울·불안 증상 완화.

  • 비타민 D : 세로토닌 합성을 촉진하고 염증을 억제하여 정신 건강 개선.

  • 비타민 B군 (B6, B9, B12 등) : 신경전달물질 합성의 필수 요소, 결핍 시 스트레스·우울 증상 악화.

  • 마그네슘 : GABA 기능을 강화하여 불안을 완화.

  • 아연 : 신경전달물질 합성과 항산화 작용을 통해 우울·불안 완화.

특히 그녀는 특정 브랜드를 꼭 구입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주석을 달아주었다. 우리는 그날 곧바로 신디 교수의 지시대로 모든 보충제를 준비해 딸에게 복용을 시작하게 했다. 마침 그 무렵, 팬데믹으로 인한 lockdown이 시작되었다. 모든 K-12 학교가 문을 닫았고, 대학도 수업과 회의가 전부 온라인 줌(Zoom)으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우리에게는 오직 딸의 생활과 변화를 면밀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세 끼 식사를 온 가족이 함께하며 과일도 챙겨 먹고, 무엇보다 딸이 보충제를 잘 챙겨 먹을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울 수 있었다. 그 가족의 식탁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장소가 되는 순간, 그 따스함이 우리의 영혼을 감싸 안아주었다. 약을 처방할 때 신디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보충제를 복용하고 식단을 바꾼 뒤, 두 달 동안 따님의 변화를 잘 지켜보세요. 만약 두 달 후에도 전혀 변화가 없다면, 안타깝지만 따님은 뇌의 역동적 장애에 의한 심각한 우울·불안 장애를 가진 것입니다. 그 경우 자해와 자살 시도가 계속된다면, 결국은 locked unit(폐쇄 병동)에서 남은 삶을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 참담할 만큼 절망적으로 들렸지만, 동시에 한 줄기 희망이기도 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소망을 붙들고, 신디 교수의 조언대로 딸의 식이요법과 보충제 복용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식이요법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뒤, 가장 먼저 기존의 식사 습관을 과감히 수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첫 단계는 집안에서 늘 먹던 백미를 치우고, 대신 비타민 B군과 미네랄이 풍부한 잡곡으로 대체하는 일이었다. 그 수정의 여정은 가을 산책로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과정이었고, 우리의 식탁이 하나님의 창조물로 가득 찬 은혜의 장소가 되는 순간을 맛보았다. 다만, 현미·귀리·보리만으로 밥을 지으면 질감이 거칠고 흩어져 먹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찹쌀을 적절히 섞었다. 구체적으로 현미 3 : 귀리 1 : 보리 1의 비율에 찹쌀 1컵을 더하니, 까끌한 맛과 푸석거림이 줄어들고 부드럽고 먹기 편한 밥이 되었다. 그 밥의 따스함이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비추는 빛처럼 느껴졌다. 식단을 바꾸는 과정에서 우리는 딸에게 식이요법의 의미와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하며 동의를 구했고, 딸도 변화를 받아들이려 애쓰며 대부분 기꺼이 협조해 주었다.

그다음 단계는 비타민 B군이 풍부한 ‘수퍼푸드’를 꾸준히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딸이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 바로 ABC 주스(apple, beet, carrot)였다. 사과는 껍질째 깨끗이 씻어 사용하고, 비트와 당근은 잘 씻어 깍둑썰기 한 뒤 전자레인지에 살짝 익혀 부드럽게 만든 후 함께 갈아 주스로 완성했다. 원래 레시피보다 다소 묽게 만들어 주니 딸도 비교적 거부감 없이 잘 마셨다. 그 주스의 달콤함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는 순간, 하나님의 창조의 열매가 우리의 삶을 적시는 은혜로 느껴졌다. ABC 주스의 성분들은 각각 뚜렷한 장점을 지닌다.

이렇게 준비한 육수와 채수는 단지 밥 짓기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아이가 좋아하는 국물 요리의 베이스로도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미역국, 된장국은 물론, 아이가 좋아하는 떡볶이, 수제비 같은 음식도 단순히 금지하기보다는 건강한 방식으로 변형했다. 흰 밀가루로 만든 면 대신 잡곡가루나 통곡, 혹은 메밀가루로 만든 면이나 수제비를 사용해 조리함으로써, 아이가 좋아하는 메뉴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영양적으로 보완할 수 있었다. 그 변형의 여정에서 우리의 식탁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장소가 되는 순간, 그 따스함이 우리의 영혼을 감싸 안아주었다. 이렇듯 나는 두 아이가 음식에서 부족할 수 있는 영양을 메꾸기 위해, 때로는 과학자의 마음으로, 또 때로는 창의적인 요리사의 마음으로 부단히 노력했다. 이러한 습관과 태도는 그때의 고군분투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 가정의 식탁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칙으로 이어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팬데믹을 ‘가혹한 시련의 시간’이라고 회상한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 팬데믹은 오히려 갱생과 회복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분명 힘들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기도 했다.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만 해도, 우리는 딸이 과연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지 깊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매일같이 퍼블릭 공간에 나가기만 하면 불안과 공황이 덮쳐와 정상적인 수업 참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과 나는 딸을 공립학교에서 자퇴시키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전 세계를 멈추게 한 lockdown이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황은 딸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 주었다. 딸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정규 수업을 이어가며, 학교를 자퇴하지 않고도 학업을 지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라운 변화는 곧 나타났다. 그동안 교실에만 들어가면 불안으로 집중하지 못했던 딸이, 온라인 환경에서는 카메라를 끄고 선생님의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수업 이해도가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성적 또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그 향상의 물결이 바다처럼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비추는 빛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서도 팬데믹 시기 온라인 학습이 사회적 불안이나 내향적인 성향을 가진 학생들에게 학업 참여를 용이하게 하고, 자기 주도적 학습을 가능하게 하여 불안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보고가 있다.

이 경험은 나의 교직 생활에도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팬데믹 동안 많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켜라고 강제했지만, 나는 딸의 경험을 떠올리며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비디오를 켜지 않고도 강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오히려 그 편이 심리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디오를 끄는 것이 어느 정도 ‘새로운 노멀’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관점 전환이었다.

더 큰 은혜는 학업 성취에서 나타났다. 딸은 11학년,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SAT를 준비했다. 미국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SAT는 매우 중요한 시험이며, 특히 약대·치대·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는 경쟁력 있는 점수가 필수적이다. 일반적으로 약대는 SAT 1300점대 이상, 치대나 의대는 1500점대 이상이 안정적인 기준으로 여겨진다. 딸은 자율 학습을 통해 1400 후반대라는 놀라운 점수를 받아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고등학교 졸업조차 불확실했던 아이가, 이제는 약대를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세상적으로는 재앙이라 불렸던 팬데믹이, 우리 가족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기회와 은혜의 길로 인도하신 사건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에는 실수가 없다. 인류에게는 경고처럼 다가온 큰 사건도, 각 개인과 가정 속에서는 다른 모양의 은혜와 응답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고백할 수 있었다.

비슷한 예로, 2007년 버지니아텍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한국계 미국인 학생 조승희(Seung-Hui Cho)가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발사하여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당한 충격적인 비극이 일어났다. 지금도 미국 사회에서 가장 참혹한 캠퍼스 총기 사건 중 하나로 자주 회자된다. 당시 버지니아텍에는 우리 부부가 에임스에서 존경하던 멘토 부부, 곧 셀장 집사님 부부가 교수로 재직 중이셨다. 사건 직후 통화를 하던 중, 집사님 아내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지금도 내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재앙과도 같은 거대한 사건을 통해서도 각 사람에게 전혀 다른 깨달음과 적용을 주십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각 사람 안에서 개별적인 역사를 이루십니다.”

실제로 그 사건은 사람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어떤 박사 과정생은 사건 직후 예정되어 있던 디펜스(논문 심사)가 학교 무기한 폐쇄로 연기되었다. 그런데 그는 불과 며칠 전 교회 기도 모임에서 “아직 준비가 부족한데 이번 디펜스를 예정된 날짜대로 치르면 통과하기 힘들 것 같다”는 제목을 나눴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참혹한 사건 속에서도 기도의 응답처럼 준비할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반면에 또 다른 박사후 연구원(Postdoc)은 정반대의 경험을 했다. 바로 그 주에 버지니아텍 교수직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사건으로 인해 학교 채용 자체가 무산되어 직장을 잃게 된 것이다. 집사님은 이 이야기를 전하며, “아마도 하나님은 그분을 더 가까이 만나 주시고, 혹시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교만을 만지시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의 재앙적 사건으로만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서 각기 다른 사람에게 맞춤형 응답과 교훈을 주시는 분이심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팬데믹이 바로 그러했다. 세상은 그것을 거대한 재앙으로만 보았지만, 우리에게는 가족이 더욱 하나가 되어 딸의 우울장애와 불안장애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결과 딸은 회복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좋은 성적을 통해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희망까지 얻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에는 실수가 없다. 인류에게는 경고처럼 다가온 큰 사건도, 각 개인과 가정 속에서는 다른 모양의 은혜와 응답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고백할 수 있었다.

확실히 팬데믹의 영향은 가족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딸에게는 인생의 절호의 기회였지만, 내 직장에는 적지 않은 충격이 찾아왔다. 당시 브릿지포트 대학(University of Bridgeport)은 많은 재정을 유학생 학비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팬데믹으로 인해 유학생들이 캠퍼스에 오지 못하면서 전례 없는 재정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실제로 COVID-19 팬데믹 기간 동안 미국 대학들의 국제 학생 등록률은 16% 감소했고, 신입생 등록은 43% 하락했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국제 학생 의존도가 높은 대학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났다.

오랜 논의를 거쳐 대학 측은 결국 매각을 결정했고, 2021년에는 Goodwin University에 3,200만 달러에 매각되었다. 그러나 매각되는 대학의 칼리지 수준이 기존의 브릿지포트 대학과 달랐기에, 교수 연봉 또한 큰 폭으로 삭감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간호학과에는 큰 혼란이 일었다. 간호사로만 일해도 교수 연봉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학과였기 때문에, 칼리지 수준의 연봉 오퍼라면 남아 있을 교수가 몇이나 될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간호 교수의 평균 연봉은 약 81,350달러지만, 등록 간호사(RN)의 평균 연봉은 75,000달러 정도로 비슷하거나 경우에 따라 오히려 낮다. 특히 관리직 간호사의 경우 더 높은 연봉을 기대할 수 있어 이직 유인이 컸다.

당시 내 예상 삭감액은 약 20,000달러, 한화로 약 2,500만 원 정도였다. 남편은 브릿지포트 대학 강사로 재직하며 남은 시간은 목회와 자녀 양육에 쏟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가계 수입은 대부분 내 몫이었다. 이 때문에 연봉 삭감은 우리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간호학과 교수들은 이직을 준비하게 되었고, 10명 이상의 동료 교수들이 인근 대학으로 지원서를 제출했다. 나는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고자, 집에서 운전할 수 있는 거리의 롱아일랜드에 있는 마운트 세인트 빈센트 대학(Mount Saint Vincent College) 간호학과로 지원했다. 판데믹 기간 동안 대부분 재택 근무를 하던 시기라 뉴욕으로 출퇴근하더라도 길이 한산했고 교통 체증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팬데믹이 해소되면서 점차 오피스 근무가 늘어나자, 출퇴근 시간이 심각하게 길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편도 1시간 15분이던 거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편도 2시간 30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그 무렵 남편은 뉴저지 북부에 개척교회를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뉴저지 지역 대학들을 지원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지원한 곳 중, 뉴저지에서 가장 큰 주립 대학인 럿거스 대학(Rutgers University)에 지원하게 되었다. 지원 후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마운트 세인트 빈센트 대학에서 둘째 학기를 강의하며 기다렸다. 그 결과, 놀랍게도 나는 럭거스 대학 전임 교수로 채용되었고, 한 학기 동안의 프로베이션 기간을 거쳐 곧 간호학과 학부 디렉터로 승진할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었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름도 빛도 없는 개척교회에서 낮은 모습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던 우리가, 바로 그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은 맞는 길임을 확증해 주신 셈이었다. 결국 우리는 뉴저지로 이주했고, 커네틱컷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삶과 사역을 이어가게 되었다. 팬데믹이라는 세상적 재앙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기회와 은혜의 길로 인도하신 사건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딸아이를 위한 식이요법과 환경 요법, 그리고 가족 역동 관리는 뉴저지 뉴브런즈윅에서도 계속되었다. 딸은 마지막 12학년을 뉴저지 피스카타웨이 고등학교에서 보냈는데, 첫 학기는 여전히 온라인 수업이었기에 학교를 옮긴 효과가 무색할 정도로 잘 적응했다. 미국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학 진학 시 얼리 입학 결정은 대개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이루어진다.

나는 럿거스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딸은 자연스럽게 럿거스 대학 내 두 학과에 지원할 수 있었다. 하나는 컴퓨터 공학, 다른 하나는 미국 내 상위권 Pharm D(약학 박사) 프로그램이었다. 럿거스 대학의 Ernest Mario School of Pharmacy는 US News & World Report 2020년 기준 약학 대학 랭킹 17위를 기록했으며, NAPLEX(약사 면허 시험) 합격률 92%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 가족은 늘 그러하듯, 입학 허가서가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하나님 뜻이라고 믿고 기도했다. 그 기도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듯한 평안이 스며들었고, 그 은혜가 우리의 두려움을 녹여내는 따스한 빛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12월, 약대에서 merit-based full scholarship으로 입학 허가 통지서가 도착했다. PharmD 프로그램 입학 시 SAT 요구점수는 학교와 프로그램마다 다르지만, 고등학교 직접 지원 시 1300~1400점대가 경쟁력 있으며, 상위권 프로그램은 학업 성적과 함께 종합 평가가 적용된다. 딸이 합격 통지서를 받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지금도 가슴 벅찬 감격으로 떠오른다.

12학년 2학기가 되면서, 팬데믹으로 인한 락다운이 풀리고 모든 수업이 in-person으로 전환되었다. 딸은 1년 반 만에 정상적으로 학교에 나가 퍼블릭 스쿨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식이요법과 환경 요법 덕분에 상태가 많이 호전된 딸은 정신과 약물 복용 없이, supplement 위주의 치료만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퍼블릭 환경에 노출되면서, 가끔 사회적 불안이 올라오고 맥박이 빨라지며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다. 이는 사회불안장애(Social Anxiety Disorder) 재발 증상으로, 연구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사회적 재노출 시 불안 증상이 20~30% 증가할 수 있다. 매번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부부는 딸을 다독이며 가능한 한 약물 치료 없이 극복하도록 격려했다.

그러나 대학 합격 후, 딸은 자연스레 일상에서 긴장감이 풀리며 게임 중독으로 빠져들었다. 인터넷 게임 장애(Internet Gaming Disorder)는 DSM-5 연구 조건으로 분류되며, 통제력 상실, 사회적 고립, 불안 증상 악화를 초래할 수 있고, 청소년의 경우 학업 성적 저하와 10~15%의 우울증 동반 위험을 높인다. 당시 나는 럿거스 대학 새 근무지 적응으로 바빴고, 남편은 개척 교회와 둘째 아이 돌봄으로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딸이 좋은 대학과 좋은 학과에 합격했기에, 부모로서 강력하게 제재하기도 어려웠다.

게임 중독을 막기 위해 우리는 가족 예배를 강제했지만, 딸은 반발하며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연구에 따르면, 강제된 종교 참여는 청소년에게 내적 동기 저하와 반항 심리를 유발하고, 신앙 이탈 위험을 25~40% 증가시킬 수 있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강제로 신앙을 전수하려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딸과 충분한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것을 돌아보며, 부모로서의 회한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돌이켜보면, 만약 그때 팬데믹 시절처럼 식이요법과 영양 밸런스를 병행하면서, 삶의 많은 시간을 딸과 함께 보내며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면, 딸은 게임 중독에서 좀 더 건강하게 벗어나고 정신적 안정도 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억지로 강요하는 신앙 교육이 아닌, 자연스러운 사랑과 관심 속에서 신앙과 삶을 함께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9. 18세~20세: Pharm D자퇴와 치료요법의 시행착오 – 식이요법, 약물치료, 가족 다이내믹스의 재구성 

딸이 피스카타웨이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다니던 시점에, 남편은 북부 버지니아의 한 교회에서 후임 담임 목사로 청빙되어 뉴저지를 떠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남편과 둘째 아이는 북부 버지니아로 이사했고, 나는 럿거스 재직 중이었기에 딸과 함께 뉴저지에 남게 되었다. 결국 주중에는 딸과 뉴저지에 머물고, 주말마다 북부 버지니아로 내려가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자동차로 매주 왕복 8시간을 운전하며 다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뉴저지에서 북부 버지니아까지 편도 약 4시간 거리였기에, 주말마다 장거리 운전을 감수해야 했고, 주중에는 딸과 함께 집에서 건강한 식사를 준비했지만, 주말이 되면 딸은 나 없이 패스트푸드에 젖어 생활하기 일쑤였다. 과도한 패스트푸드 섭취는 고열량·고지방·저영양으로 인해 비만, 염증 증가, 정신 건강 악화(예: 우울증 위험 40% 상승)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가족이 흩어져 살면서 자연스레 구심력은 떨어지고, 딸의 생활 패턴과 식습관도 점점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럿거스 대학의 약학대학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딸을 북부 버지니아로 데리고 갈 수도 없었고, 결국 나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럿거스 대학을 사임하고 남편을 돕기 위해 북부 버지니아의 작은 대학으로 이직하기로 결심했다. 주말 부부 생활을 두 학기 동안 이어간 후, 나는 결국 쉐난도아 대학(Shenandoah University)으로 이직하게 되었고, 딸은 럿거스 대학 기숙사에 홀로 남게 되었다.

딸이 기숙사에 입소하던 날, 그녀는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했다. “여기서 혼자 잘 지낼 자신이 없다. 학교를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처음엔 그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단호하게 기숙사에 남겨두었다. 이후에도 자주 전화를 통해 안부를 물었고, 딸은 전화에서 “잘 지내고 있다, 수업도 잘 듣고 있다”고 말했지만, 부모로서는 그 말만으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한편, 남편이 부임한 교회는 기대와 달랐다. 그곳에서는 남편이 꿈꾸던 지역 교회를 통한 선교 확장 비전을 실현하기 어려웠고, 왜 하나님이 이러한 교회로 인도하셨는지, 왜 이런 이유로 내가 럿거스 대학에서 쉐난도아로 옮기게 되었는지 수많은 질문과 원망이 마음속에서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로 인해 딸의 상황과 심리적 상태에 충분히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시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새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크더라도, 랭킹이 높은 약대에 입학한 딸은 우리에게 은근한 자부심과 기쁨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기쁨이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새로운 올무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시기였다.

남편과 나는 후임 목회자로 청빙될 당시, 그 교회가 우리의 마지막 임지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동안 딸아이를 돌보느라 제대로 된 목회지를 만나지 못해 겪었던 좌절과, 참담한 상황 속에서 느낀 심정을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참담함이었다. 겉으로 보면 안정적인 사례비가 매달 들어오는 조건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실제로 남편에게 제시된 사례비를 확인한 후, 나는 과감히 럿거스 대학을 사직할 수 있었다. 당시 럿거스에서는 내가 실질적인 경제적 가장이었기에 연봉 포기가 쉽지 않았지만, 후임으로 부른 교회에서 제시한 연봉은 평균 부목사 사례를 상회했고, 이는 중소형 교회 담임 목사 연봉($60,000 전후)과 비교해 경쟁력 있는 수준이었다. 참고로 미국 목회자 평균 연봉은 지역과 교회 규모에 따라 $50,000~70,000 정도이며, 교수직 연봉($80,000 이상)과 비교하면 경제적 희생이 불가피한 수준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럿거스에서 쉐난도아 대학으로 옮기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교회에 부임하고 허니문 기간이 지나자, 현실은 훨씬 혹독했다. 평소 스트레스 역치가 높고 침착하기로 유명한 남편조차 밤잠을 설치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보았고, 나는 이곳은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님을 직감했다. 결국 남편은 1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는 내가 럿거스를 그만두고 쉐난도아로 옮긴 지 3개월째 일어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거의 전 재산을 투자했던 기관이 파산하면서 통장의 저축은 제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럿거스에서 약대를 다니고 있는 딸은 우리에게 위로이자 자랑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던 11월 말, 딸의 advising 카운슬러로부터 연락이 왔다. 딸이 시험에서 크게 실패한 후 “죽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카운슬러는 프로토콜에 따라 경찰을 불러 딸을 확인하도록 조치했다고 했다. 곧 경찰과 앰뷸런스가 딸의 기숙사에 도착했고, 그녀를 럿거스 대학 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다.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는 자살 위험이 있는 학생을 발견하면, 법 집행 기관과 정신 건강 전문가의 즉각적인 개입이 표준 프로토콜로 요구된다. 이는 학생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과잉 대응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며,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개입은 자살 시도율을 10~20%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카운슬러와 경찰, 911 시스템에 대해 우리는 원망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직업 윤리와 가이드라인을 따랐을 뿐이었다.

쉐난도아 대학 학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남편과 나는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픽업한 뒤 뉴저지로 향했다. 차 안에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큰일이 아니길, 응급실에서 빨리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절망의 늪은 깊고 멀게만 느껴졌다. 올라가는 내내 우리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간간히 뒷자리에서 둘째가 우리를 웃기려 재롱을 부릴 때,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둘째는 늘 우리 가족에게 위기의 순간마다 웃음을 주는 존재, 일종의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처음 둘째 임신을 기대할 때, 나이는 이미 42세였고 임신 유지 기간 또한 힘겨웠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원할 때는 주시지 않고 이제야 주셔서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 하고 원망도 했다. 그러나 둘째를 낳고 삶의 끔찍한 터널을 지나면서, 왜 하나님이 늦게라도 둘째를 주셨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커네틱컷에서 딸의 불안 장애와 우울 장애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딸과 단둘이 차를 타고 상담 치료를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딸은 극도로 싫어하며 반항했고, 나의 인내는 한계에 다다랐다. 순간적으로, 차를 몰고 어디론가 떨어져 둘이 그냥 없어져야 이 고통이 끝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향해 전력을 다해 질주할 순간, 해맑게 웃는 둘째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남편이 아닌 둘째의 그 해맑게 웃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속도를 줄이며, 죽음을 포기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둘째는 하나님의 기막힌 타이밍 속에서 우리를 극심한 고통에서 건진 존재였다. 실제 연구에서도 긍정적 가족 상호작용, 특히 유머와 웃음은 스트레스 버퍼링 효과로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회복력을 높여, 가족 정신 건강을 20~30% 향상시킬 수 있음이 보고된다. 우리 가족에게 둘째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밤 10시쯤, 우리는 뉴저지 럿거스 대학병원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당시 딸은 나의 건강 보험 플랜에 디펜던트로 포함되어 있었으나, 플랜은 버지니아 주 밖 응급실 치료를 거의 보장하지 않는 제한적 조건이었다. 미국 건강 보험은 HMO, PPO 등 플랜 유형에 따라 out-of-state 루틴 케어를 제한하거나 전혀 적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응급 상황이라도 일부만 커버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대형 병원의 응급실 체류 비용을 고려하면, 단순 대기만으로도 하루 약 $10,000 이상의 비용이 발생할 수 있었다. 오늘 밤 12시 기준으로 딸이 이틀간 체류하게 된다면, 비용은 최소 $20,000 이상으로 치솟을 전망이었다. 특히 1대1 감시가 필요한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된 딸에게는 감시자 배치가 특별치료로 간주되어, 하루 체류 비용이 상상을 초월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하필 재정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점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원망스러웠다. 차 안에서 나는 다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오늘 밤 12시가 되기 전에 퇴원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마음속 깊이, 하나님께서 이 긴박한 순간 속에서도 우리 가족을 지켜 주시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딸은 자살 위험 분류군으로 지정되어 locked unit에서 1:1 감시자와 함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전화기는 모두 빼앗긴 상태였고, 입고 있는 옷도 일반 사복이 아닌 병원에서 제공한, 스스로 해를 끼칠 수 없는 옷으로 갈아입혀진 상태였다. 이는 미국 병원에서 자살 위험 환자에 대한 표준 프로토콜로, 연속 모니터링과 안전 조치를 포함하며, Joint Commission 지침에 따라 고위험 환자는 반드시 연속 관찰을 받도록 되어 있다.

딸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진심으로 죽을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단지 기말고사를 망쳐 약대 1학기를 다시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 없이 카운슬러에게 이메일을 보냈을 뿐이며, 오늘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나는 공감을 표하면서도, 이번 일을 교훈 삼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담당 간호사에게 담당 의사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담당 의사는 한국계 2세인 도씨성을 가진 의사였다. 미국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 2세들은 종종 서로에게 매정하거나 무례할 때가 많았다. 그날 만난 의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공감 능력은 부족한 채, 법과 규정을 강조하며 매우 드라이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딸이 병원에 오버나이트 체류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자, 그는 “너는 동의안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미 딸은 만 18세를 넘긴 성인이기 때문에 부모 동의가 필요 없으며, HIPAA 규정에 따라 부모가 의료 정보를 공유받으려면 환자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의사에게, “지금 딸이 기말고사 기간인데, 병원에 잡혀 있어 오늘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내일도 코어 과목 시험이 예정되어 있는데, 너희 때문에 시험을 못 보게 되면 책임을 질 수 있겠냐?”고 강하게 말했다. 그는 “규정대로 환자를 오버나이트 시켜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그 룰은 너희 소통의 부재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딸이 이곳에 갇힌 지 12시간이 지나도록 담당 정신과 의사와 만나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하루에 만 달러가 넘는 병원비가 추가됐다. 보험도 out-of-state라 비용이 거의 커버되지 않는다. 이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이어서 “오늘 밤 12시까지 퇴원시키지 않으면 우리도 부모로써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도 경고했다.

그는 담당 정신과 의사로부터 클리어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담당 정신과 의사와 직접 통화할 수 있게 했다. 다행히, 그 정신과 의사는 내가 재직 중이던 쉐난도아 대학 정신 간호학 담당 교수였고, 사적으로도 통화 가능한 사이였다. 만약 이 연결이 없었다면,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이 순간, 하나님께서 쉐난도아 대학으로 인도하신 은혜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면회 시간이 끝난 후, 대기실에서 남편과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의 형편과 간절함을 아시는 하나님께, 밤 12시 전에 딸을 퇴원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기적처럼, 딸에게 퇴원 오더가 떨어졌고, 밤 11시 45분, 밤12시 15분 전에 극적으로 하루 응급실 체류로 퇴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근 호텔로 이동해 네 식구가 함께 짐을 풀고 누울 수 있었다. 너무 긴 하루였기에, 무겁고 답답한 마음은 뒤로 하고, 우리는 깊은 잠에 빠졌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우리 셋은 깊고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제야 우리는 딸이 우리와 헤어지고 혼자 기숙사에 남게 되면서 거의 은둔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딸은 기숙사 식당에 나갈 용기도 내지 못했고, 벤딩 머신에서 치토스 같은 정크 과자를 뽑아 물이나 주스와 함께 먹으며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크 푸드 중심의 식단은 고당분, 고지방, 저영양으로 인해 뇌 염증을 증가시키고,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을 깨뜨려 불안과 우울 증상을 30~50% 악화시킬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과 젊은 성인에서 이러한 식습관은 사회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딸은 수업에도 거의 나가지 못했으며, 우리에게는 출석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결석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만 치른 상태였기 때문에, 사이사이에 있었던 그룹 프로젝트와 과제 평가는 모두 영점 처리되어, 약대 코어 과목 대부분에서 F가 예상되는 상태였다.

이처럼 대학생에서 관찰되는 사회적 철퇴(social withdrawal) 또는 히키코모리 현상은 팬데믹 이후 미국 대학생 중 10~20%에서 나타나며, 불안 장애와 학업 실패를 동반하고 장기적으로 자퇴율을 15~25%까지 높일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우리 부부는 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문이 막히고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시계를 되돌려, 버지니아 북부에서 청빙 공고를 처음 봤던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은 아쉬움과 원망이 밀려왔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후회가 없다는 믿음으로 애써 그런 생각들을 내려놓으려 노력했다.

딸의 상황을 들은 후, 우리는 의외로 쉽게 딸의 자퇴를 권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이미 13년간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학생을 지도해 온 경험이 있었기에, 딸에게 권할 수 있는 선택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딸은 처음에는 “기말고사 시험만 보고, 그 후 휴학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 결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는 다른 선택임을 바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냥 자퇴하고 우리와 함께 버지니아로 내려가자. 지금 휴학을 해도 F로 가득한 과목 이수는 의미가 없고, 약대를 다니면서 줄곧 컴퓨터 공학을 포기해야 했던 네 마음의 후회는 해결되지 않을 거야.” 이어서 나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네가 진짜로 휴학하고 다시 약대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그 질문 앞에서 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자퇴에 동의했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 대학에서 정신 건강 문제로 자퇴하는 학생은 약 20%에 달하며, 휴학 대비 자퇴 학생의 재입학률은 낮지만(30% vs 70%), 장기적으로 정신 건강 회복에는 더 유익할 수 있다는 결과가 있다. 그날, 우리는 딸이 정신적 회복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돕는 순간이었다.

그 길로 우리는 딸의 기숙사에서 짐을 챙겨 나와 버지니아로 내려왔다. 내려와서 딸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일도 하지 않으며 집에서 지내기를 4개월간 지속했다. 내가 출근하면 남편이 딸을 데리고 공원이나 숲으로 데려가 산책을 시키고, 다시 영양 균형이 이뤄진 식이요법을 하면서 쉐난도아 대학의 동료이자 딸의 정신과 의사에게 딸의 치료 계획을 상의했다. 그녀는 딸의 지금 상태로는 식이요법과 환경 가족 요법만으로는 상태가 완전히 호전될 거라 보기 어렵다고 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절대적인 신경전달 물질의 부족이 의심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은 약물요법을 시작하고 용량을 조절해 가며 맞는 약의 맞는 용량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어떤 치료법이든 우리는 마음이 열려 있다고 말하면서도, 남편과 나는 내심 그래도 목회자 자녀인데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기보다는 자연치료법으로 나았다고 간증하고 싶은 욕심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듣자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일었다. 그러나 전문 의료인으로서 내가 세부 전공하지 못한 정신과 전문 영역을 존중하기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2023년 1월부터 딸은 항불안제로 SSRI 계열인 Lexapro를 저용량으로 시작했다. 약의 반응이 좋아서 아이의 무드가 급격하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약물요법에 이어 식이요법과 자연요법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자 딸은 미국에 다시 돌아온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레스토랑에 나가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남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밖에서의 외식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기적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무드가 향상되고 불안이나 공황장애 증상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자 딸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또다시 공황 상태에 빠질까 봐 두렵다고도 했다.

당시 남편은 이전에 청빙받아 왔던 교회를 11개월 만에 사임했고, 그 후 4개월 뒤에 성도 세 가정과 함께 현재의 인투교회를 개척했다. 감사하게도 당시에 그 세 가정 중 한 가정이 변호사/교수 커플 가정이었어서 교회를 NGO로 등록하여 정식으로 플랜팅하는 것이 수월했다.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물을 때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사인으로 맞다고 말씀하셨는데, 그중의 하나가 그때 잠시 우리 개척 단계에 교회 성도로 머물러 있던 그 변호사의 도움이었다.

딸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람을 예비하셨다는 생각에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교회의 개척 멤버 가정의 자녀가 우리가 살던 센터빌의 한 공차 가게에서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혹시 딸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게 해줄 수 있냐고 물었고, 그렇게 지인 찬스로 딸은 공차 가게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이삼일 나가서 하루에 6시간 정도 일하는 조건으로 시작했다. 남들처럼 대학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규 직장이 있어서 만 18세가 지나서 혼자 독립한 것도 아니라서 딸은 그 부담감에 아르바이트를 어떻게든 견뎌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딸과 우리 부부의 조마조마하며 기다렸지만 기대했던것과는 달리 첫날 공차 가게 아르바이트를 다녀오고는 딸은 많이 울었다. 손님 응대를 버벅거리면서 하는 자신이 싫고, 그런 자신을 무시하는 손님과 직장 동료를 마주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며 울었다. 그럴 때마다 딸이 겪은 증상을 들어보니 심계항진 그리고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는 것이 아마도 공황 상태로 빠져드는 위험이 몇 번 있었던 것 같은데, 무사히 잘 견디고 지났다는 생각이 들어 장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주치의를 만나서 다시 약물 조절을 의논해도 괜찮다고 격려했다. 딸은 우리가 정신과 약물을 극도로 꺼려하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어서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부모의 큰 서포트를 느낀다고 했다. 우리의 격려로 딸은 정신과 주치의와 다시 만나 의논한 후 SSRI인 Lexapro에 더해 NDRI (Norepinephrine-dopamine reuptake inhibitor)인 Bupropion을 추가했다. 게다가 심계항진이 있을 때마다 먹는 약으로 Propranolol인 beta blocker도 추가가 되었다. 정신과 약물이 한 종류에서 세 가지로 늘어난 것이 내심 걱정스럽고 마음이 어려웠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딸을 격려하려 했다.

딸은 당시 운전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하는 것 자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안 장애 증상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에 가까운 곳은 걸어다니거나 우리 부부의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그 아르바이트 가게는 집에서 걸어서 약 3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에는 딸이 적어도 밖에서 1시간 10분 이상을 걸어야 했다. 우리는 이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자연 치료의 기회라고 여기며 깊이 감사했다. 방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던 이전의 딸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절망적이었는지를 떠올리면, 이렇게 밖을 걸어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우리 가족에게 크나큰 감사 제목이 되었다. 공차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매일매일은 딸에게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고, 눈물과 감사가 뒤섞여 희비가 교차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 같은 시간들이었다.

딸이 공차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쉐난도아 대학에서 부교수이자 랩 코디네이터로 재직 중이었다. 쉐난도아 대학은 우리가 살고 있던 버지니아의 한인 타운인 센터빌에서 서쪽으로 편도 1시간 20분 정도를 운전해야 하는 윈체스터(Winchester)라는 도시에 위치해 있다. 왕복으로 2시간 40분 가까이 되는 긴 통근 시간은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나를 숨 막히게 한 것은 윈체스터에 있는 쉐난도아 대학 간호학과의 인구 구성 비율이었다. 21세기 다문화·다민족 사회가 일상화된 대도시에서 최근 몇 년간 살아온 나로서는 백인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그곳의 환경이 전혀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진도 유색 인종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백인 중심의 대학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교수 생활 13년 차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 해는 미국에서 교수직을 수행하며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기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강의를 시작하기 직전에는 손이 떨리고 심계항진이 느껴져 연구실에서 조용히 묵상 기도를 드린 후에야 교실로 들어갈 수 있는 날이 빈번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딸아이의 불안 장애는 어쩌면 나로부터 유전된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의 시선이 의식되어 너무 떨리고 불안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은 쉬는 시간을 평소보다 길게 가져야 할 정도였다. 그 쉬는 시간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은 빌립보서 4장 13절이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성경 구절은 이후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나에게 경종을 울리는 알람처럼 작용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라면 충분하다는 깨달음으로 그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불안의 강도를 더 이상 이기지 못하고, 나는 남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남편은 당시 막 개척 교회를 시작한 상태였고, 내가 쉐난도아 대학을 그만둔다 해도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주변 학교에 교수직 오프닝이 있으면 믿음으로 지원하면 되니, 지금 너무 힘들다면 그만두는 것도 괜찮다고 격려해 주었다. 그때가 4월이었고, 봄 학기 마무리까지는 약 한 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보통 미국 대학에서는 사직을 결정한 경우, 그만두기 2주 전에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이 관례이다. 너무 일찍 사직 의사를 밝힐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예방하기 위함이 크다. 그런데 남편과 그런 결정을 내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에 웬일인지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믿음으로 한 걸음 나아갈 때 하나님이 선대해 주실 것 같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맡고 있던 보직인 랩 코디네이터의 후임을 찾고, 인수인계 및 트레이닝을 제대로 해줄 목적으로 사직서를 8월로부터 4개월 앞당긴 4월에 제출하였다. 다행히 후임자가 정해져 인수인계와 약간의 트레이닝을 마친 후에 나올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미국 간호학과의 교수직 공석은 5월에 많이 발생하는 편이다. 그래서 사직서를 제출한 후 5월이 지나기 전까지는 평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5월이 지나도 주변 대학에서 적합한 오프닝이 나타나지 않았다. 서서히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의료보험은 8월 말이면 종료될 예정이었고,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남편과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인 딸은 매달 의사를 만나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 가족에게 또 다른 시련으로 다가왔지만, 동시에 믿음의 시험대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기도뿐이었다. 그 시기, 우리 교회를 개척할 때 함께 모인 멤버들은 각자 깊은 아픔을 간직한 가정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아픔들의 공통 분모는 바로 우울증이었다. 가족 중 누군가, 아니면 본인이 우울증과 함께 살아가는 멤버들이 모여 교회를 개척하다 보니, 우리 교회는 규모는 작았지만 하나 되는 힘과 연합의 능력만큼은 다른 어떤 교회에도 뒤지지 않았다. 우리는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린 후, 일주일 동안 같은 성경 본문을 가지고 큐티(QT: Quiet Time) 나눔을 진행했다. 우리 부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멤버들이 1.5세대나 2세대여서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유창하게 구사하거나 영어만 편안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큐티 모임은 한국어 그룹과 영어 그룹으로 자연스럽게 나뉘어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나와 남편이 번갈아 한국어와 영어 그룹을 인도했지만, 나중에는 우리 개척 멤버 중 한 분이신 안수집사님을 훈련시켜 그분이 영어 그룹을 맡아주시게 되었고, 덕분에 나는 한어 그룹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워낙 소수 인원으로 시작한 우리 공동체였기 때문에, 각 가정의 기도 제목을 서로 훤히 알고 지내며 깊은 유대감을 쌓아갔다.

우리는 주일 외에도 주중에 두 번 더 모임을 가졌다. 매주 수요일에는 함께 모여 성경 공부를 했고, 매주 금요일 밤에는 금요 성령 기도회를 열었다. 특히 금요 기도회는 남편 목사님이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인도하셨다. 아직 기도 훈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성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모임이 시작되자마자 찬양 한 곡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전체 기도 제목을 제시하고 공동 기도를 시작했다. 이렇게 첫 30~40분 동안은 공동 기도 제목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기도한 후, 그다음에는 찬양을 잠시 멈추고 각 가정의 기도 제목을 돌아가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각 가정의 구체적인 상황과 어려움을 자세히 듣고, 함께 기도하며 공감했다. 그런 후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서도 지속적으로 중보 기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 가정도 예외 없이 모든 문제를 빛 가운데 드러내 공동체와 나누었다. 이전에 목회자 가정이라는 이유로 딸아이의 문제를 숨기고 나누기를 꺼려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냈다. 나의 직장 문제 역시 모두에게 공개하며 함께 기도 제목으로 삼았다.

이렇게 고난을 당할 때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악한 사단은 우리에게 부끄러움과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심어주어 문제를 기도 제목으로 드러내지 못하게 꼬드긴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속내를 터놓지 못하는 관계로 전락하게 되고, 결국 사단의 궁극적인 목적—즉,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균열 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모든 어두움, 아픔, 수치심을 빛 가운데로 가지고 나아가 드러내야 한다. 공동체와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며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며, 교회 공동체에 부여하신 사명이다. 나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딸의 문제와 나의 직장 문제를 부끄럼 없이 우리 인투교회 공동체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딸의 문제는 곧 우리 교회의 공동 문제가 되었고, 내 직장의 문제 역시 모두의 기도 제목이 되어 열심히 함께 기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한 모임이 아닌, 진정한 영적 가족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경험했다.

금요 기도회에서 나의 직장 문제를 솔직하게 나눴던 6월의 어느 금요일, 교회 성도 중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어느 대학으로 이직하고 싶으세요? 콕 집어 말씀해 주시면, 그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기도 지원하겠습니다.” 이 질문은 얼마나 은혜롭고, 믿음으로 충만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사모로서 평소에 이런 믿음의 질문을 성도들에게 던져본 적이 있었던가 자문하며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도 그런 확신 있는 믿음의 태도를 항상 유지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래서 나는 가장 가고 싶은 대학으로, 집에서 불과 15분 거리에 위치한 조지 메이슨 대학(George Mason University)을 꼽았다. 그곳이라면 긴 통근 시간의 피로 없이 가족과 교회 사역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성도님은 즉시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조지 메이슨에 교수 자리 오프닝이 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되겠어요”라고 응답하셨다. 그 순간, 공동체의 연합된 기도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모일 때마다 조지 메이슨 대학에 내가 채용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자리가 열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기도는 단순한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 지속되는 중보의 연장선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6월 내내 주변 대학들에서 적합한 오프닝이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7월이 되자마자 갑자기 조지 메이슨에 교수직 공고가 뜬 것이다. 이는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기이하고, 하나님의 개입처럼 느껴지는 타이밍이었다. 그 당시 나는 교회 공동체와 그렇게 애타게 기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약한 믿음을 드러내며 6월에 이미 오프닝이 난 조지 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지원서를 넣어두었던 터였다. 인터뷰 과정이 1차, 2차, 3차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이곳이 하나님의 인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그러나 인터뷰를 거듭할수록 내가 원치 않는 조건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그곳은 처음 교수 임용 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조교수(Assistant Professor)부터 시작한다는 규정이 있었고, 내가 이미 13년 차 교수 경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직 없이 다시 그 단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 내심 부담스러웠다.

더욱이 가장 매력적이었던 점, 즉, 9월부터 바로 일할 수 있는 잡 오퍼(job offer)라는 사실, 에도 불구하고, 12개월 계약이라는 조건이 걸림돌이 되었다. 내가 9개월 계약의 교수 자리를 선호하는 이유는 여름 사역 때문이었다. 여름마다 마음껏 단기 선교나 교회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데, 12개월 티칭 자리는 여름에도 휴식 없이 계속 강의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럿거스 대학(Rutgers University)에서 경험한 바 있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모로서의 삶에 더 합당한 9개월 계약 자리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조지 워싱턴의 조건은 그 점에서 맞지 않았다. 마지막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비선으로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 그곳은 나를 연구 중심의 교수로 보아 티칭 비중이 큰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다른 주니어급 지원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나니, 오히려 아쉬움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길로 인도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 섭리처럼 느껴졌고, 덕분에 조지 메이슨 대학에 대한 기도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은 우리 가족과 교회 공동체에게 믿음의 여정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은혜로운지 깨닫게 해준 귀한 경험이었다.

8월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 나는 조지 메이슨 대학의 채용 소식이 여전히 들려오지 않자, '혹시 이곳이 안 된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깊은 두려움에 다시 한 번 휩싸였다. 불확실한 미래가 눈앞에 아른거렸고, 그 불안감은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때, 대안으로 페어팩스 암 센터(The Next Oncology)의 코디네이터 자리에 지원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백업 플랜이 아니라, 당장의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선택지로 보였다. 지원 과정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1차 인터뷰에서 내 경험과 자격을 인정받았고, 2차 인터뷰에서도 구체적인 업무 적합성을 논의하며 무사히 통과했다. 결국, 제법 빠른 속도로 잡 오퍼(job offer)를 받게 되었는데, 이전 쉐난도아 대학보다 무려 2만 달러나 높은 연봉을 제시받아 내심 놀랐다. 이 연봉이라면 남편의 사례비가 계속 없더라도 우리 가족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솟아올랐다.

그 오퍼를 받자마자 나는 깊은 기도로 나아갔다. '하나님, 이곳이 정말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인가요? 이 연봉이면 남편의 목회 사역에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하며 간절히 물었지만, 기도 중에 성령님께서 연봉에 대한 카운터 오퍼(counter offer)를 내라는 강한 감동을 주셨다. 처음에는 이것이 단순한 내 욕심인지, 아니면 진짜 하나님의 뜻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남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함께 기도했다. 놀랍게도, 남편도 똑같은 감동을 받았고,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확실한 인도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 감동에 순종하여 원하는 금액으로 카운터 오퍼를 제출했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암 센터 측에서 오퍼를 철회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더 충격적인 것은, 내가 카운터 오퍼를 철회하더라도 그들의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이었다. 너무 황당하고 당황스러워서 한동안 믿기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하나님의 감동이라고 믿고 따랐는데...' 하는 자책과 혼란이 밀려왔다. 당장 9월부터 직장이 없어진다면, 사례비조차 없는 남편과 함께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암담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경제적 압박과 가족의 미래가 동시에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그러나 9월이 되어서도 조지 메이슨 대학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 침묵은 오히려 더 큰 긴장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있음을 믿는 시험의 시간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순한 직장 이직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영적 여정의 일부였다.

쉐난도아 대학에서의 공식 재직 기간은 8월 마지막 날까지였지만, 9개월 계약직 교수로서 나는 이미 6월 중순부터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통장의 잔고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의 믿음마저 함께 소진되는 듯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 경제적 압박은 우리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딸이 아르바이트에 안간힘을 다하는 이유도 바로 가계의 부담을 느껴서였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믿음으로 딸을 대학에서 자퇴시키고 버지니아로 데려온 결정의 후폭풍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 그 후폭풍은 예상치 못한 네 가지 재정적 충격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는 딸이 대학 입학 시 FAFSA(Federal Student Aid)를 통해 대출받았던 3,300달러를 상환하라는 통지서였다. 이는 연방 학자금 대출의 기본적인 절차이지만, 자퇴로 인해 즉시 상환 의무가 발생한 것이다. 두 번째는 딸이 merit-based(성적 우수 기반)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던 약대에서 8,800달러를 환불하라는 요구였다. 장학금은 학업 지속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에, 중도 포기로 인해 반환해야 할 금액이 청구된 셈이다. 세 번째는 딸이 경찰을 동원한 앰뷸런스에 실려간 비용으로 1,500달러가 청구되었고, 네 번째는 그 응급실에서 하루를 머문 병원비로 무려 11,500달러가 날아왔다. 이 모든 비용은 미국 의료 시스템의 높은 가격 구조와 보험 미적용으로 인해 더욱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이러한 빚의 총액은 우리 가족의 재정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단순한 숫자가 아닌 삶의 무게로 느껴졌다.

나는 딸에게 진지하게 조언했다. “너는 이제 18세 이상의 성인이니, 이 청구서들이 부모에게 직접 날아오지는 않아. 하지만 계속 네 앞으로 올 거야. 갚지 못하면 신용 기록에 문제가 생겨 미래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으니, 대학과 뉴저지 주 정부를 대상으로 어필(이의 제기)을 해보라고.” 그러나 딸아이의 가장 큰 문제는 예측하지 못한 일이나 처음 겪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불안을 극대화하고, 그것이 결국 공황 상태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딸은 어필 과정을 강하게 거부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내가 “그럼 어떻게 하겠어?”라고 물으니, 딸은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해서 직접 갚아나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나는 강제적인 설득보다는 본인이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말로 다투지 않고 딸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는 부모로서의 지혜로운 선택으로, 딸의 자립심을 키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딸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다. 원래 일주일에 2~3일 나가던 아르바이트를 4~5일로 늘리며,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피로와 스트레스를 견디며 통장에 조금씩 돈을 모았고, 마침내 FAFSA 대출 3,300달러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작은 승리처럼 느껴졌지만, 동시에 나머지 빚, 8,800달러의 장학금 환불, 1,500달러의 앰뷸런스 비용, 그리고 11,500달러의 병원비, 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현실이 딸에게 현타(현실 타격)로 다가왔다. 이 압도적인 금액 앞에서 딸은 어쩔 수 없는 helplessness(무력감)와 hopelessness(절망감)를 느끼며 망연자실했다. 그 감정은 단순한 재정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의 정신 건강을 다시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우리 가족이 함께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시련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은 믿음의 여정에서 재정적 어려움이 어떻게 영적 성장의 촉매가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 귀한 교훈이었다.

시간당 14달러를 받으며, 하루 6시간씩 주 4일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 노력으로 겨우 3,300달러를 모으는 데 5~6개월이 걸린 경험이 딸에게 미지의 도전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원래 딸은 뉴저지 주정부, 대학, 병원 같은 기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는 불안 때문에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육체 노동으로 빚의 일부만 갚을 수 있었던 그 힘든 시간이, 오히려 딸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그 후 딸은 과감하게 럿거스 대학, 럿거스 대학 병원, 그리고 뉴저지 주정부에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고, 필요할 때는 전화까지 걸어 어필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debt collector로부터 빨간 딱지가 붙은 편지가 우편함에 도착할 때마다 딸은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네가 어필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분명히 움직이실 거야"라고 위로하며 딸을 안심시켰다. 남편은 한술 더 떠서 "설령 그렇게 되지 않아 debt collector들의 성화로 jail에 가게 되더라도, 그건 범죄 기록이 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마. 그냥 jail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면 해결되는 일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에 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위기를 넘겼다. 그 웃음 속에는 긴장된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기운이 스며들었다.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면서도 딸은 틈틈이 어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먼저 럿거스 대학 병원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왔다. 앰뷸런스 비용 1,500달러와 응급실 치료비 11,500달러를 전액 탕감해 주겠다는 메일이 도착한 것이다. 메일에는 '너의 due는 zero'라는 문구가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딸은 환호성을 지르며 외쳤다. "하나님이 하셨어, 엄마!" 그 말은 딸의 입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온, 하나님을 인정하는 표현으로 기억된다. 그 기세를 몰아 럿거스 대학에도 집중적으로 어필한 결과, 8,800달러의 빚이 모두 면제되었다.

모든 빚이 변제되는 데 거의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 기간은 인내의 연속이었지만, 믿음으로 간구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생생한 간증이 딸의 마음에 새겨졌다. 이 사건은 딸에게 단순한 빚 청산 이상의 의미를 주었다. 미지의 도전에 맞서는 용기와, 신앙의 힘을 깨닫는 소중한 여정이 되었다. 만일 그때 우리의 저축 계좌(savings account)에 여유 자금이 남아 있었다면,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주저함 없이 딸의 그 빚을 순식간에 갚아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로서의 본능적인 선택이었을 테고, 딸의 부담을 덜어주며 가족의 평안을 되찾는 가장 빠른 길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시기에 우리가 저지른 투자 실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모든 자산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참사)로 인해, 우리는 그저 딸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 외에 실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무기력함이 우리를 더욱 괴롭혔고, 그 순간은 믿음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절박한 시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직장이 없는 상태에서 수입 없이 점점 비어가는 통장을 바라보며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이 상황은 정말로 우리가 2003년 미국에 처음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최대의 경제적 위기였다. 인생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했던 순간으로, 단순한 재정난이 아닌 영혼까지 짓누르는 절망의 연속으로 기억된다. 그 해 9월이 되고 내가 공식적으로 직장이 없게 되자, 당장 의료보험이 상실되었다. 의료보험 없이 딸이 전문 정신과 의사(specialty doctor)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한 번에 250달러 가까이 들었고, 한 달치 약값도 비슷한 250달러에 달했다. 이런 현실적인 비용 부담은 우리 가족의 일상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고, 매일의 생계조차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딸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최근 컨디션이 많이 좋아져 약을 끊으려던 참이었다며, 이제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지 않고 약물 요법을 지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딸의 건강이 걱정되어 마음이 아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어려움이 하나님께서 미리 디자인하신 숨겨진 섭리, 즉, 약물 의존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회복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계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사할 수 있었다. 이 결단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딸의 내면적 성장과 우리 가족의 믿음이 맞물린 순간이었다.

그렇게 딸은 9월 말부터 정신과 약물 요법을 완전히 중단하게 되었다. 중단 과정에서 예상되는 부작용이나 재발의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그녀의 결의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중순, 기적처럼 내게 조지 메이슨 대학의 부교수 잡 오퍼가 들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학기가 진행 중이어서, 풀타임으로는 이듬해 1월부터 시작할 수 있고, 10월 중순부터 12월 말까지는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이 오퍼는 완벽한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온 하나님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나는 주저할 생각도, 이유도 전혀 없었기에 그 오퍼를 당장 수락했다. 이는 단순한 직장 복귀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재정적 안정과 미래를 향한 새로운 출발점으로 여겨졌다.

나는 매일 파트타임으로 조지 메이슨 대학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수입이 완전히 끊긴 채로 지내온 지난 4개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를 철저히 낮추시고 깊은 회개의 시간을 허락하셨다. 그 기간은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영적 정련의 과정으로 느껴졌다. 하루는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철저한 회개'를 요구하시는 음성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회개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깊고 근본적인 회개를 촉구하시는 듯했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더 철저히 회개해야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순종의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가 깊어지면서, 하나님이 그동안 나를 광야 같은 시련 가운데 두시면서도 당신의 손으로 싸매시고 보호하시며, 날개 아래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셨음이 생생히 깨달아졌다. 그 보호의 은혜가 떠오르자, 나는 통곡하며 감사로 넘쳐흘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깨달음으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불 속에서도, 물 속에서도 내가 너를 보호해 왔건만, 네 입술에서 감사가 말라버렸다." 이 말씀은 내 영혼을 꿰뚫는 화살처럼 다가왔다. 나는 목 놓아 울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솔직한 고백이 쏟아져 나왔다. "맞아요, 하나님… 주님의 능력의 손이 나를 붙들어 주셔서, 이제껏 미국에서 살며 주제넘게도 단 한 달의 공백 없이 교수직으로 이어지게 해주신 건데, 저는 그걸 제 실력으로 착각하며 감사 없이 살아왔어요. 게다가 주님이 귀하게 인도하신 직장마다, 감사가 끊어진 대신 불평과 원망이 넘쳐났었네요. 죄인 중의 괴수처럼 감사 없는 삶을 살아온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시작된 회개의 물결은 단순한 죄책감에 머물지 않고, 내 삶의 전 영역을 꿰뚫어 살피게 만들었다. 사역자의 길을 걸어오면서도 영혼을 향한 마음이 메말랐던 순간들, 가족과 일상에 치여 예배의 깊은 감격을 잃어버린 시간들, 그리고 편안한 안락과 금전적 이익을 좇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성경의 원리를 어긴 무리한 투자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하나같이 내 안에서 각양각색의 더러운 우상을 고이 모셔두고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 앞에서 내 마음은 참람하고 참담했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 내 연약함과 잘못됨을 바라보며, 나는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엎드려, 눈물과 탄식 속에 멈추지 않고 회개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회개의 흐름은, 내 삶을 새롭게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간절히 구하며 계속되었다. 이 회개는 단순한 일회성 감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루, 일주일, 한 달이 지나면서도 그 흐름은 멈추지 않았고, 내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교만과 불신앙,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하나씩 드러내는 과정을 거쳤다. 매 순간, 내 영혼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야 했고, 이 과정을 통해 내 마음속 뿌리 깊은 연약함과 허물을 직면할 수 있었다.

그 회개의 절정에서 나는 하나님께 서원과도 같은 다짐을 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 새 직장에서는 더 이상 불평과 원망의 말을 내뱉지 않겠습니다. 감사와 기쁨과 평안의 언어로 하루를 채우며 살겠습니다. 이곳을 주님이 허락하신 마지막 장으로 여기고, 충성스럽게 섬기며, 하나님의 제자로서 삶의 향기를 풍기겠습니다." 이 서원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내 삶의 새로운 원칙이자 나를 붙드는 영적 토대가 되었다. 만약 지난 4개월간의 거룩한 쉼과 경제적 곤핍의 시간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조지메이슨 대학에서조차 감사하지 못하고,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며 다른 곳을 바라보며 내 의와 내 생각으로 지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고난의 형상으로 내게 찾아온 지난 4개월의 무직 기간은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를 다시금 정결하게 하고, 내 영혼을 정화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또한 그 시간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내적 친밀감과 신뢰를 깊게 다지는 기회가 되었으며, 내 삶 속에서 감사와 겸손이 자리 잡도록 이끄는 놀라운 회복의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과의 그 약속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첫 출근을 시작했다. 여전히 그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가며,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추구한다. 이 경험은 나에게 영원한 교훈을 남겼다: 진정한 회개는 보호받은 은혜를 깨닫고, 그에 합당한 감사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

10. 21세: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 시작, 샬롬의 여명 – 회복의 빛과 지속적 예방 전략

하나님의 은혜로 2023년 10월, 나는 조지메이슨 대학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 임시 디렉터가 나에게 뉴저지 주 간호사 면허를 버지니아 주로 변경해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이는 이미 쉐난도아 대학에서 일할 때 한 번 시도했던 일이었다. 그때 버지니아 주 당국은 내 간호학 학부 학위를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진행된 나라(한국)에서 취득했다는 이유로 CGFNS(Council on Graduate of Foreign Nursing Schools) 인증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CGFNS 인증서는 2006년 영주권을 받을 때 필수 서류 중 하나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부 졸업까지의 모든 학력 증명서와 학부 코어 과목의 강의 계획서(syllabi)까지 제출해야 발급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 과정을 완료하는 데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렸고, 특히 고등학교 서류를 떼는 데 번거로움이 컸다. 당시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도와주실 수 없어, 타지에 사는 형제가 일부러 내가 졸업한 여고까지 가서 서류를 준비해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미 미국 시민이 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그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 국적을 상실한 상태에서 고등학교나 대학 서류를 어떻게 다시 구비할지 방법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암담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CGFNS에 직접 전화해 항의했다. "이미 인증서를 받았는데, 왜 5년마다 만료되도록 하고, 당신들이 발급한 증명서를 스스로 믿지 못해 같은 절차를 반복하게 하는 거죠? 이건 모순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의 답변은 그저 "프로토콜을 따를 뿐"이라는 형식적인 말뿐이었다. 변함없는 규칙 앞에서 나는 한숨만 나왔다.

팬데믹 시기, 간호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대부분의 주가 응급 법령을 바꿔 면허를 서로 호환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뉴저지 주 면허로 버지니아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이는 주거지가 뉴저지일 경우에만 합법적이었다. 쉐난도아 대학 시절에는 뉴저지에도 주거지가 있어 문제가 없었지만, 조지메이슨으로 이직할 때는 뉴저지의 모든 짐을 처분하고 버지니아로 완전히 이주한 상태였다. 따라서 디렉터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었다. 어렵게 입사한 자리에서 또 주 면허 문제로 좌절할까 봐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게 끝인가…"라는 절망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지난 4개월 동안 오프닝이 없던 자리를 기도하며 기다렸던 시간, 1차·2차·3차 면접을 통과하며 큰딸, 남편, 둘째 아들과 함께 가족예배에서 오픈하고 기도했던 시간들, 공동체와 함께 기도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 응답의 기쁨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믿음이 솟아났다. 그래서 나는 믿음으로 버지니아 주 간호사 보드(Virginia Board of Nursing)에 dispute 이메일을 보냈다. 내용은 이랬다: "미국 시민이 되기 전에 이미 CGFNS 인증서를 받았고, 그 후 여러 주에서 면허를 취득해 일한 경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10년 넘게 간호학 교수로 재직 중인 사람에게 갓 이민 온 외국인 간호사처럼 서류를 요구하는 건 모순입니다." 메일을 보낼 때 조지메이슨 간호학과의 직속 상관 두 명의 이메일도 CC로 첨부해 그들도 함께 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와 함께 기도했다. "하나님, 이 일이 당신의 뜻이라면 문을 열어주소서."

놀랍게도 버지니아 보드는 다음 달 규제 부서 미팅에서 이 사안을 논의한 후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약 3주 후인 12월 초, 특별 케이스로 내 dispute를 받아들여 버지니아 주 간호사 면허를 발급해 주었다. 이는 우리 가족에게 큰 표징이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부부는 2013년 펜실베니아 주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두 번이나 면허 변경 신청을 했지만, 동일한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 안디옥 교회에서의 사역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번에도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개척한 인투교회를 떠나라는 신호로 여길 참이었다. 그러나 홍해가 갈라지는 듯한 이 기적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열심과 인도를 깨닫고 더욱 깊은 순종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순한 행정적 해결이 아니라, 믿음의 여정으로 우리를 더 강하게 세워준 소중한 증거였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는 우리 가족의 삶 속에서 쉼 없이 이어지며, 매 순간마다 그분의 손길을 새롭게 드러내고 있었다. 2023년 12월, 크리스마스의 따뜻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시즌에 몇몇 교역자 가정들이 송년회를 함께 모여 즐기던 그 자리. 그곳에는 다른 교회의 신실한 집사님 가정들도 합류해, 공동체의 따스한 교제가 흘러넘쳤다. 바로 그때, 남편은 처음 만난 한 남자 집사님으로부터 버지니아 주 패어팩스 카운티의 'First Home Buyer Program'에 대해 소개받게 되었다. 그 집사님은 목사 가정인 우리를 보며, 이 프로그램이 주택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지원 단계 하나하나를 세세하고 정성스럽게 설명해 주셨다. 남편은 평소에 그런 제안에 쉽게 동요하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성령의 강한 감동이 마음을 사로잡는 듯했다. 그래서 배운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차근차근 실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프로그램은 지원자가 많아 경쟁이 치열한 탓에, 평균적으로 당첨되기까지 2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우리는 지원 준비 단계부터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해"라고 서로를 격려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미래에 우리 가정에게 안정된 보금자리를 예비해 주실 하나의 길로 이 프로그램을 삼아 주실 거라는 믿음을 품고, 차분하고 꾸준히 준비를 이어갔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 지원의 핵심 필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버지니아 주 운전면허 소지였다. 감사하게도, 내가 그해 12월 초에 간호사 면허를 버지니아 주로 변경하면서 자연스럽게 뉴저지 주 운전면허도 버지니아 주로 전환하게 되었고, 덕분에 프로그램 지원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세밀하고 완벽한 인도를 깊이 느꼈다. 우연처럼 보이는 연결 고리 하나하나가 그분의 섭리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해 나의 4개월 무직 기간은 가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남편에게도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남편은 자신의 PhD 학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직업에 지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심지어 패어팩스 공립학교의 버스 드라이버 자리에도 도전할 만큼, "뭐라도 하나 걸리면 좋겠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원하는 족족 실패의 쓴맛을 봐야 했고, 그동안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강사 자리마저 연구 경력 단절을 이유로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사례비조차 없는 목회 사역만을 묵묵히 감당하며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으로는 서운함과 절망이 쌓여 하나님께 눈물로 속내를 털어놓던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절박한 시기 속에서 조지메이슨 대학의 파트타임 교수 자리를 얻은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린 감격스러운 선물이었다. 그 자리는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으로 느껴졌다.

당시 조지메이슨 대학 간호학과는 이듬해 4월에 CCNE(Commission on Collegiate Nursing Education) 인증 평가를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인증 평가 경험이 풍부한 교수를 서둘러 채용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내가 지원할 무렵 이미 수많은 지원서가 쌓여 있었고, 나보다 학력과 경력이 훨씬 더 화려한 후보자들이 즐비했을 터였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게도, 연약하고 부족한 나를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세워주셨다. 대구대학교에서 5년간 재직하며 두 번의 인증 평가를 직접 준비했던 경험, 그리고 브릿지포트 대학, 럿거스 대학, 쉐난도아 대학에서 AACN/CCNE의 새 기준(New Essentials)에 맞춰 커리큘럼을 재정비하던 시기를 거치며, 본의 아니게 인증 평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실무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학교를 자주 옮겨다니며 겪었던 그 힘든 여정 – 얼마나 낙심하고 눈물을 흘렸던가.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숨어 있었다. 그 고난이 없었다면 조지메이슨 대학으로 오는 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깨달음은 고난이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는 소중한 티켓임을 다시금 고백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눈물이 미래의 축복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남편의 지원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던 그 절망적인 시기, 우리는 이듬해 1월부터 내가 풀타임 전임 교수로 일하게 되면 경제적으로도 숨통이 트일 거라는 소망을 안고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내 마음속 깊은 소원은 조지메이슨 대학으로 가는 이 새로운 출발을 성스럽게 여기며, 주신 직장의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장 잔고를 들여다보니 렌트비를 내고 나면 그럴 여력이 남아 있을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끔 교제를 나누던 한 목사님 가정이 우리를 식사에 초대했다. 헤어질 무렵, 그분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목사님 가정에 선물을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합니다"라며 우리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는 우리가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큰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조지메이슨 대학에서 받은 첫 열매를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 교역자 가정과 좋은 동역자로서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돈은 그 가정의 사모님이 새 직장에서 받은 첫 열매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소름 돋는 간증인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두 가정의 첫 열매를 받으시며, 서로를 통해 은혜의 물결을 흘려보내신 그 순간, 우리는 감격에 감격을 더하며 그분의 사랑에 압도되었다. 이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과 무한한 공급의 생생한 증거였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는 우리 가족의 삶 속에서 쉼 없이 이어지며, 매 순간마다 그분의 손길을 새롭게 드러내고 있었다. 남편이 지원했던 대부분의 GS(Government Service) 직위에는 번번이 낙방의 쓴맛을 봤지만, 패어팩스 공립학교 버스 드라이버 자리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대형 버스 드라이버 라이선스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한 끝에 이론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이제 추천인 확인 단계만 남아 있었다. 규정상 추천인 두 명 중 한 명은 반드시 남편의 상사(supervisor)가 되어야 했는데, 남편은 다른 직장에서 일하는 상황이 아니었고 오직 개척 교회 담임목사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교회의 개척 멤버 중 보드 오브 트러스티(Board of Trustees)의 디렉터로 섬기던 안수 집사님을 supervisor로 추천인 자리에 넣었고, 그 사실을 집사님께 미리 알려드렸다.

몇 주가 지난 후, 패어팩스 카운티로부터 그 집사님께 레퍼런스 콜이 갔다. "사무엘(남편)이 당신의 수퍼바이저가 맞습니까?"라는 질문에 집사님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사무엘은 내 수퍼바이저가 아니라, 나의 담임 목사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해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남편은 졸지에 허위 기재를 한 사람이 되어 버렸고, 지원은 물거품이 되었다. 패어팩스 카운티로부터 이 피드백을 받은 남편은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아, 하나님께서 이리도 막으시는구나…"라는 깨달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고. 그때 남편은 오하이오 주의 퍼듀 장로교회로부터 청년부 집회 강사로 초청받은 상태였고, 만약 버스 드라이버에 합격했다면 그 집회를 즉시 취소해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 이런 우스꽝스러운 레퍼런스 혼동으로 인해 직장 지원이 실패하면서, 남편은 퍼듀 장로교회 청년 집회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겨우 내가 풀타임으로 일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아 재정적으로 빠듯한 상황이었지만, 비행기 티켓도 자비로 부담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2박 3일 집회에 대한 사례비도 받지 않고 그대로 반납하며 돌아왔다. 그런 우리의 헌신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실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 기복적인 믿음은 집회 중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집회에 참석한 이유 중 하나는 딸이 은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 딸은 내가 무직 기간 동안 부담스러운 약값과 진료비 때문에 정신과 약을 모두 중단한 상태였고, 대체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집회 현장에서 수많은 청년들 속에 섞인 딸은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호흡 곤란으로 숨을 몰아쉬며 엉엉 울면서 집회장 밖으로 나와야 했던 딸을 보며, 딸도 울고 나도 울었다. 하나님께서 왜 이리 야속하게 느껴지는지, 원망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집회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사단의 역사로 느껴졌다. 사실 사단의 흔적은 도착하던 공항에서도 나타났다. 공항에 도착해 라이드를 기다리던 중, 버지니아 집 주인으로부터 갑작스러운 통보가 왔다. "5월 말까지 나가 주세요." 원래 5년 이상 테넌트로 살아달라고 해서 계약했던 집이었는데, 주인은 집값이 많이 올라 올해 팔아야겠다고 나가라고 했다. 집회를 앞두고 일어난 일이라 사단의 방해임을 직감했고, 우리는 덤덤히 받아들였다. 딸의 공황 상태도 믿음으로 덤덤히 넘겼고, 나는 딸에게 "집회 참석을 그만두자"고 권했다. 그렇게 딸은 둘째 날과 셋째 날을 홀로 호텔에서 보내야 했고, 남편은 주 강사로서 2박 3일 청년부 집회를 은혜롭게 인도한 후 버지니아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가 돌아온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2년을 기다릴 각오로 지원했던 First Home Buyer Program에 놀랍게도 당첨되어 집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실제 시장 가격보다 20만 달러나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고, 다운페이도 집 가격의 3% 이상만 하면 되는 환상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3%의 현금조차 없던 때라, 너무 빨리 당첨된 게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돌이켜 보니 2003년 미국에 온 이후로 그렇게 가난했던 적이 없었다.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 메마른 땅처럼 비틀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내게 TIAA(Teachers Insurance and Annuity Association)로부터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내게 은퇴 자금을 불입해 온 게 있었구나…" 그러나 65세 이전에 이 자금을 현금 인출(cash advance)하면 세금을 호되게 물어야 해서 실제 금액의 60%밖에 돌려받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반대로 그 돈을 그대로 두면 복리로 불어나 노년에 안정된 연금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 우려를 남편에게 털어놓자, 그는 단호하게 물었다. "너는 네가 65세까지 살 거라는 100% 확신이 있나? 내일 일도 모르는 우리가 앞으로 20년 후 일을 어떻게 아는가?" 그의 질문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동조해, 의심 없이 은퇴 자금을 모두 인출해 다운페이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결정은 단순한 재정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미래를 맡기는 믿음의 행보였다.

반면 딸은 집회 중에 경험한 공황 상태로 인해 다시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약물을 처방받아 복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약물 요법에 더해 식이 요법과 환경 요법을 균형 있게 병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딸을 지원했다. 건강한 식단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환경을 조성하며,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를 통해 딸의 회복을 도왔다. 그 노력의 열매로 딸의 상태는 금세 안정되기 시작했다. 기분이 밝아지고, 우리 부부와의 대화도 깊어지며,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거리낌 없이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가족 간의 유대가 더욱 돈독해지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딸이 과감하게 선언했다. "엄마, 아빠, 나 다시 대학을 가야겠어!" 시간당 14달러의 시급으로 일하며, 인간답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딸은 대학 재도전을 선택했다. 학과는 원래 꿈꾸던 컴퓨터 관련 분야로 정했고, 내가 근무하는 조지메이슨 대학의 컴퓨터 엔지니어링 프로그램에 원서를 넣어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이 소식은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이었지만, 딸은 럿거스 대학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합격 통지서를 받자마자 여기저기 장학금을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번번이 돌아오는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딸이 신입생이 아닌 전학생 신분이라 현재 조건으로는 장학금 신청 자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학생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12학점 이수 성적 증명서와 높은 GPA를 제출해야 했는데, 딸의 경우 대부분의 코어 과목에서 낮은 성적을 받았고, 그나마 높은 점수는 고등학교 때 미리 들었던 AP(Advanced Placement) 과목들뿐이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장학금 문이 열리지 않자, 딸은 입학 확정금 250달러를 돌려받기 위해 환불 기한이 지나기 전에 입학 취소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실제로 그 돈을 환불받았다. 이전에 경제 관념 없이 살던 딸의 모습에서, 지난 1년 남짓한 사회 생활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느껴졌다. 부모가 말로 가르치기 어려운 인생 레슨  (경제적 자립과 현실 인식)을 딸은 'hard way'로 배웠지만,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오히려 딸의 성숙을 증명하는 귀한 열매로 돌아왔고, 우리는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감사하며 바라보았다.

딸은 학비를 절감하기 위해 '2+2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이는 첫 2년 동안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기초 과목을 이수한 후, 주니어 학년 때 조지메이슨 대학으로 편입해 추가 2년을 공부하며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 학위를 마치는 실용적인 경로였다. 이 결정은 딸의 과거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로운 선택으로 보였다. 럿거스 대학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 비용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꿈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디는 방식이었다. 우리 부부는 딸의 이런 결정을 전적으로 믿고 지지했다. "잘한 선택이야, 네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니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야"라고 칭찬하며, 딸의 자립심을 격려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설령 딸이 컴퓨터 분야가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느껴 다시 포기하고 뛰쳐나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 선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난 실패가 딸에게 준 교훈처럼, 삶의 우회로도 성장의 일부일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딸에게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무슨 전공을 선택하든, 우리 가족과 함께 살며 학교를 다녀야 해." 이는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딸의 신앙과 전반적인 삶의 영역을 여전히 돌봐야 한다는 깊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과거 기숙사 생활에서의 고립과 어려움을 겪은 후, 딸을 멀리 '덤프'하는 듯한 선택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 길을 걷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딸도 이 조건에 흔쾌히 동의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인생의 실패를 겪고 싶지 않아요. 부모님과 함께 살며 다닐 수 있는 학교로 갈게요"라고 안심시키며, 가족의 따뜻한 품 안에서 안정감을 찾는 모습을 보였다. 이 순간, 우리는 딸의 성숙함을 새삼 느꼈다. 과거의 실수에서 배운 교훈이 이제는 안정된 미래를 향한 든든한 기반이 되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순한 대학 재입학이 아니라, 가족의 신뢰와 사랑이 엮인 새로운 출발점으로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의 인도는 여전했다. 패어팩스 카운티로부터 이사 갈 집을 선택하라는 통보가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다. 이 소식은 단순한 행정적 절차가 아니라, 그동안의 기도와 기다림에 대한 응답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온 가족이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따스한 봄기운이 스며드는 오후, 차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하며 기대감을 나누었다.

현장에 도착하자, 셀링 매니저가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하며 두 개의 유효한 유닛을 소개했다. 크기와 구조는 동일했지만, 뷰가 확연히 달랐다. 하나는 창밖으로 울창한 숲이 펼쳐지는 곳으로, 전경이 탁 트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푸른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새소리가 상상되며, 평화로운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다른 하나는 넓은 잔디밭이 눈앞에 펼쳐지는 곳으로, 아이가 집 앞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실용적인 매력이 돋보였다. 가족의 일상이 활기차게 펼쳐질 수 있는 공간으로 보였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망설이며 고민하던 순간, 매니저가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숲을 바라보는 유닛들은 사실 웃돈을 얹어 팔 수 있을 만큼 인기 있지만, 카운티 소유의 집이라 그런 프리미엄을 붙일 수 없어서 아쉽죠." 그 말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처럼 우리 가슴에 와닿았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달았다. 이 숲 뷰 유닛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랜 시간 예비하고 기다리시던 보금자리라는 것을. 그곳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평안을 누리며 가족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은혜의 공간이었다. 우리는 주저 없이 그 유닛으로 계약을 진행했다. 이 선택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세워주는,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증거가 되었다.

렌트하던 집 주인이 5월 말까지 비워달라고 한 그 요구를 하나님께서 마치 직접 들으신 듯이, 집 구매 과정 전체를 놀라울 만큼 순조롭게 인도해 주셨다. 모든 서류 작업과 절차가 물 흐르듯 진행되어, 정확히 5월 말에 클로징을 마무리되고 기존 집을 비워 새 보금자리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의 속도는 그 누구도 믿기 어려울 만큼 신속했기에,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건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해"라고 고백하며 간증을 나누었다. 그 감격은 단순한 말로 그치지 않고, 삶의 증언으로 이어졌다.

특히, 함께 중보 기도해 주던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 소식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의 여정이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실현되는 생생한 증거로 비쳐졌다.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것은, 이 모든 과정을 함께 기도하며 옆에서 지켜본 우리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아이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직접 목격하며 자연스럽게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터뜨렸다. 특히 딸이 큐티(QT, Quiet Time) 나눔 시간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볼 때, 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솟구쳤다. 그 순간, 내 안의 모든 것이 그분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며 또다시 찬양으로 넘쳐흘렀다. 이 경험은 우리 가족에게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믿음의 여정이 결실을 맺는 영원한 추억으로 새겨졌다.

새 보금자리로 이사 온 후, 우리 가족은 식이 요법, 가족 산책, 그리고 가족 예배를 통해 더욱 깊은 회복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푸른 숲이 창밖으로 펼쳐지는 이 유닛은 단순한 뷰가 아니라, 우리의 정서적 안정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매일 아침 햇살이 숲 사이로 스며들며 부드러운 녹음을 선사하는 그 광경은, 지난 시련의 상처를 서서히 치유하는 자연의 포옹처럼 느껴졌다. 집 앞 산책로를 따라 온 가족이 매일 같이 걸으며, 우리는 하루의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나누었다. 그 대화 속에서 서로의 기도 제목을 자연스럽게 발견하고, 감사한 일들을 공유하며 기쁨을 배가시켰다. 작은 성공 이야기나 예상치 못한 은혜를 털어놓을 때마다, 가족의 유대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는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영혼의 교제이자 하나님의 은총이 스며드는 소중한 의식이었다.

딸이 2024년 가을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의 또 다른 선물이 우리에게 도착했다. 그해 버지니아 주 정부는 여러 직업군의 인력 부족 현상을 분석한 결과, IT 분야가 심각한 shortage로 꼽혔고, 이에 따라 관련 학과를 장려하기 위한 정책을 발표했다. 버지니아 주 내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년도 W2 소득 보고가 평균 이하인 경우 학비를 전액 면제해 주는 주 정부 차원의 지원이었다. 마침 전년도에 내가 뜻하지 않게 4개월의 무직 기간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의 보고 소득은 패어팩스 카운티 4인 가족 기준으로 저소득층에 해당했다. 이 덕분에 딸의 학비가 앞으로 2년간 전액 면제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되었다. 이 정책은 단순한 재정적 혜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의 필요를 세밀하게 아시고 채워주시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 무렵 딸은 9학년 고등학생의 수학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너무 감사히 여긴 딸은 그 과외로 벌어들인 첫 월급을 첫 열매로 드리며, 감격스러운 고백을 털어놓았다. "엄마, 아빠, 제가 공차에 입사해서 첫 열매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제가 갚아야 할 수만 달러의 빚을 탕감해 주신 것처럼, 이번에 드리는 첫 열매도 어차피 하나님의 것이에요." 이 말은 예사롭지 않은 믿음의 고백이었다. 딸의 태도가 초긍정적으로 변한 것은 단순한 믿음의 진보를 입증하는 증거일 뿐 아니라, 과거 부정적이고 우울하던 상태가 이제 밝고 희망적인 호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뜻했다. 그 순간, 우리는 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치유 작업을 목격하며, 감격에 젖었다. 이 모든 여정은 우리 가족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영원한 간증이 되었다.

2년의 공백을 딛고 다시 대학 생활을 시작한 딸은, 공부가 이전의 육체 노동보다 훨씬 수월하다며 학업을 진심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한 번도 수업을 빼먹지 않고 걸어서 버스를 타고 학교로 통학하는 딸의 모습은, 우리 부부에게 큰 기쁨이자 안도감을 주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숙제를 열심히 하는 그 태도는, 과거의 방황을 딛고 일어선 딸의 성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처럼 안정된 일상이 자리 잡아가는 와중에, 나는 우연히 red meat(붉은 고기)이 불안 장애와 우울 장애를 호전시킨다는 기존 연구와 상반되는 몇몇 논문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내용들은 오히려 붉은 고기가 그런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관점이었는데, 딸의 경우와 상당히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아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우리 부부는 딸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설득에 나섰다. 붉은 고기를 피하는 것보다 섭취하는 것이 딸의 건강에 더 유익할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설명하며, 식단 조정을 제안했다.

처음 딸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오랜 세월 동안 붉은 고기를 혐오하며 피해온 터라, 그 제안 자체가 불편하고 낯설었을 터였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끈질긴 설명과 사랑 어린 설득 끝에, 딸은 마침내 "일주일에 딱 한 번만 소고기를 먹어보겠다"고 양보했다. 다만, 자신이 먹을 수 있는 텍스처는 오직 차돌박이뿐이라고 단서를 붙였다. 우리는 딸의 이 작은 타협을 소중히 여기며, 최대한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프리미엄 차돌박이를 구입해 일주일에 한 번 소금구이로 요리해 주었다. 간단한 소금 간으로 고기의 본연의 맛을 살린 그 요리는, 딸의 입맛에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영양을 공급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딸이 처음 차돌박이 소금구이를 먹던 날, 그 순간의 고백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엄마, 아빠,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소고기를 먹는 순간 눈이 밝아지고 머리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어." 이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딸의 몸이 보내는 강력한 신호였다. 평생 동안 신선한 붉은 고기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고, 가공된 육류를 가끔씩 섭취한 것이 전부였던 딸의 신체가, 이제야 그 영양소의 필요성을 깨닫고 반응하는 듯했다. 그 이후로 딸은 자발적으로는 아니지만, 우리가 "딸아, 일주일에 한 번 약 먹는 날이야"라고 부드럽게 설득할 때마다 마지못해 따랐다. 어떤 날은 코를 막고 억지로 삼키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딸 스스로 "그래도 먹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이 과정은 딸의 건강 회복을 위한 작은 승리이자, 우리 가족의 인내와 사랑이 엮어낸 소중한 여정으로 느껴졌다.

새 보금자리로 이사 온 후, 나는 딸을 위해 더 나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단순히 감정적인 지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자 했고, 만약 제2, 제3의 '내딸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을 연구를 통해 돕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이러한 바람은 딸이 대학 생활을 재개할 무렵 구체화되었다. 나는 우리 대학의 영양학과 석사 과정에 지원해 합격 통지를 받았고, 2025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영양학 공부를 시작했다. 간호학 시절과는 달리, 영양학은 순수한 필요와 동기에서 선택한 분야였다. 딸의 지난 경험 (불안과 우울, 그리고 식단의 불균형)이 시금석이 되어, 배우는 내용 하나하나와 읽는 논문 한 편 한 편이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공부가 이토록 재미있고 논문이 술술 읽히는 경험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지식의 흡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매 순간이 딸의 건강과 연결되는 듯한 설렘이 가득했다.

영양학 공부를 통해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나는 딸의 영양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다각적이고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딸은 과일 편식도 심해, 주지 않으면 아예 먹지 않고 주어도 본인이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는 습관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5년 초부터 장을 볼 때마다 세 가지 이상의 다양한 색깔 과일을 반드시 사 오기로 했다. 딸의 선호를 묻지 않고, 그 과일들을 조금씩 썰어 예쁜 접시에 담아 내밀며 "이건 엄마의 사랑, 아빠의 사랑이야"라고 평소 나답지 않은 애교를 부렸다. 이 작은 의식은 단순한 식사 제공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으로 승화되었다. 딸은 거절하지 못하고, 억지로라도 한 입씩 베어 물었고, 점차 그 맛에 익숙해지며 영양 균형을 맞추는 데 도움을 받았다. 이 과정은 우리 모녀 사이의 유대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었고, 딸의 미소가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보며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왜 이런 작업들을 아이가 어렸을때 해주지 못했을까… 후회에 젖어들곤 할때가 많다.

반면 아들에게는 다른 전략을 적용했다. 딸과 달리 아들은 지적 호기심이 강했기에, 각 과일의 효능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접근했다. "이 빨간 사과는 항산화 물질이 많아서 피로를 풀어주고, 노란 바나나는 칼륨이 풍부해 근육을 튼튼하게 해"라고 구체적으로 풀어가며, 결국 다양한 색깔의 과일이 면역력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면역 약화의 위험  (피로 누적, 잦은 감기, 장기적인 건강 문제)를 설명하면, 아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한 개씩이라도 맛보는 습관을 들였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로운 색깔과 맛의 과일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켰다. 아들에게는 '새로운 도전과 발견'을 목표로, 딸에게는 '다양한 영양 충족'을 목표로 한 이 맞춤형 영양 관리는, 우리 가족의 일상을 더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이 모든 노력은 단순한 식단 조정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어우러진 가족의 여정으로 느껴졌다.

딸은 첫 학기에서 모든 과목 A를 받아 'Straight A'를 달성하며 Dean’s List에 이름을 올렸다. 이 성취는 딸에게 단순한 학점 이상의 의미였다. 그동안 스스로를 '찐다 머저리'로 여기며 자책하던 딸에게, 커다란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었다. 그 빛은 딸의 내면에서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과거의 자조적인 말투가 점차 사라지며, 자신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긍정적인 표현들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나도 할 수 있어"라는 작은 속삭임부터, 자신의 노력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대화까지, 딸의 변화는 우리 가족에게도 큰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 기세를 몰아 두 번째 학기에도 모든 과목 A를 받으며 President's List에 오르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딸을 키우며 이런 Dean’s List나 President's List 같은 명예 목록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딸이 이전에 그런 영예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내내 어려움을 겪던 딸의 여정에서, 이런 순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축복이었다. 이 연이은 성공은 딸에게 더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마침내 학교 장학금 신청으로 이어졌다. Personal Statement에서 딸은 자신의 배경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목사 가정의 자녀로서의 삶, 앞으로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으로 조지메이슨 대학 주니어 학년으로 편입할 계획, 그리고 이를 위해 과학 분야 장학금이 경제적 안정과 진학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임을 강조하며 에세이를 썼다고 한다. 그 글 속에는 딸의 꿈과 결의가 생생히 녹아들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진정성이 넘쳤다.

그리고 딸은 나에게 말했다. "엄마, 일단 될지 안 될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걱정하지 말자." 이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딸의 성숙한 믿음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과거의 불안과 실패를 딛고,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태도는 우리 가족의 신앙 여정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이 모든 과정은 딸의 재탄생처럼 느껴졌고, 우리는 그 여정을 함께 걸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두 번째 학기 동안 딸의 안정된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내가 그동안 맡아왔던 주일학교 교사 역할을 딸에게 넘겨주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내가 리드를 맡고 딸이 보조로 참여하게 하며 천천히 적응시켰고, 점차 딸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했다. 과거 공공장소에 서는 것조차 두려워해 레스토랑에서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딸이, 이제는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봉사하는 모습을 보니 내게는 그야말로 신묘막측한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저 감사함이 물밀듯 밀려오며,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며, 불같은 시련과 물같은 고난 속으로 던져 넣으시기도 했지만, 그 모든 과정 가운데서 우리를 지키시고 다듬으시며 아름다운 열매로 만드신 손길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고 한없었다. 딸이 다른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들처럼 방방 뛰며 하이퍼하게 에너지를 뿜어내는 스타일은 아니더라도, 딸 나름의 조용하고 진심 어린 방식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늘 감사했다. 그 헌신을 인정하고, "고마워,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라고 말해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 과정은 단순한 역할 이양이 아니라, 딸의 성장과 하나님의 은혜가 어우러진 소중한 여정으로 우리 가족의 신앙을 더욱 깊게 새겨주었다.

우리 교회에서 올해 처음으로 해외 단기 선교를 나서게 되었다. 목적지는 과테말라로, 이 소중한 기회를 위해 우리 공동체는 3개월 동안 열정적으로 준비를 이어갔다. 매주 모여 기도하고, 프로그램을 세밀하게 다듬으며, 서로의 기대와 설렘을 나누는 그 시간은 교회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딸에게는 이 선교가 큰 근심의 원천이 되었다. 낯선 환경과 긴 여정에 대한 불안이 쌓여 가끔씩 스트레스를 폭발적으로 표출하곤 했고, 그 모습은 우리 부부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딸의 감정 기복을 지켜보는 일은 때때로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이끌었다.

나는 더 열심히 기도하며 딸의 안정을 도모했고, 식단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면서 운동량과 일조량을 부지런히 체크했다. 매일 아침 창문을 열어 햇살이 충분히 들어오게 하고, 산책 시간을 늘려 딸의 몸과 마음이 균형을 되찾도록 노력했다. 특히 딸에게 부족한 영양소가 무엇일지 깊이 고민하며,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창의적인 보충 방법을 모색했다. 채소와 육수를 활용한 스프나 국물 요리는 기본이었고, 영양 흡수를 돕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섞어 맛있게 조리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러나 녹색 야채를 비롯한 다양한 색깔의 야채를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섭취하게 하는 방법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편식 습관 때문에 자꾸 피하려 했고, 강제로 먹이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봐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던 중, 영양 보충제 중에서 20가지 야채를 말린 후 갈아 분말로 만든 제품을 발견했다. 비록 제로 칼로리 스위트너가 약간 들어가기는 했지만, 건강한 요소를 최우선으로 삼아 그 불건강한 부분 하나쯤은 감수하기로 했다. 이 제품은 야채의 영양을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는 이상적인 대안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그 분말을 물이나 주스에 타서 아이들에게 주었고, 딸은 예상외로 "생각보다 먹을 만해"라고 하며 잘 받아들였다. 반면 아들은 처음에 크게 거부감을 보였다. 그 맛과 텍스처가 낯설어 고개를 저으며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꾀를 부렸다. 메탈릭 보온병에 분말을 넣고 흔들어 거품을 내어, 빨대를 꽂아 시선을 돌리며 재미있게 제시했다. "이건 특별한 마법 음료야!"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니, 아들도 점차 익숙해지며 제법 잘 먹게 되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식단 관리 이상의 의미였다. 창의적인 접근으로 아이들의 건강을 챙기며, 가족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균형 잡힌 식사를 창의적으로 실천하며, 우리는 여름 선교를 향한 준비를 이어갔다. 딸의 스트레스는 서서히 누그러들었고, 우리 가족은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한층 더 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모든 노력은 선교의 성공을 위한 기반이 될 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사랑과 인내를 배우는 귀한 여정이 되었다. 선교 가기 전 딸은 학교에서 2500불의 STEM scholarship를 받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선교에서 미디어 팀으로 섬기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줬고 선교지에서 현지 아이들에게 사랑도 받이 받았다. 선교를 통해 아이가 섬기는 기쁨을 배운것 같아서 너무 감사했다. 돌아온 후에 딸은 더욱 식이 요법, 약물 요법, 일조량 요법, 및 환경요법등에 너무나 잘 따르고 있고 매일 매일의 웃음소리와 감사의 소리가 증가하고 있는것을 본다.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는 여전히 딸의 불안 장애와 우울 장애와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때때로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를 엄습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의 빛줄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이제 우리 가족과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어려움과 내면의 어두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 말씀 안에서, 공동체의 따뜻한 교제 속에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그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기꺼이 선택한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기도하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더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영혼의 회복을 위한 성스러운 여정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딸과의 지난 8년여 사투를 통해, 내 안의 아집과 고집을 모두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과거에는 내 생각만이 옳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는 그 틀을 깨고 오픈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심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딸의 고통을 통해 내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며, 더 유연하고 공감 어린 태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여정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분의 인도와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에, 나와 딸, 그리고 우리 가족은 오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기대 속에는 두려움보다는 평안이, 절망보다는 희망이 가득 차 있다.

11. 이야기를 접으며

가족 회복의 여정

딸의 불안장애가 시작된 그날부터 우리 가족의 일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때 딸은 겨우 10살이었고, 갑작스러운 불안 발작으로 인해 학교 가는 길조차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가족여행? 그것은 먼 꿈처럼 느껴졌다. 제대로 된 여행을 다닌 적이 없었다. 딸은 차 안에서조차 불편함을 호소하며, 창밖 풍경을 보는 대신 눈을 감고 웅크리곤 했다. 차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극도의 공포였다. 불안이 심해지면 공공 화장실조차 거부하며, "엄마, 집에 가자"라고 애원했다. 여행은 늘 다툼의 연속이었다. 호텔 체크인부터 식사 시간까지, 모든 순간이 전쟁 같았다. 밥을 먹는 일, 차에서 내려 산책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딸에게는 불편하고 두려운 도전이었고, 우리는 그와 맞서 싸우듯 여행해야 했다. 결국, 즐거움이 아니라 지옥 같은 고통으로 변질되었다. 남편과 나는 지쳐서 포기했다. "다음에 가자"는 말로 위로하며, 어느 순간부터 가족여행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집 안에서만 안전한 일상을 유지하며, 8년 가까이 그렇게 버텼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올해 여름, 딸이 과테말라 단기선교를 떠나기 직전이었다. 딸은 조용히 다가와 "엄마, 우리도 가족여행을 다녀왔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8년 만의 제안이었다.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짐을 꾸렸다. 비행기 대신 차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캐나다 토론토와 오타와로 향하는 6일간의 여정. 토론토의 번화한 거리와 CN 타워의 전망, 오타와의 의사당과 리도 운하의 평화로운 풍경을 상상하며 출발했다.

여행 내내 아이들은 차 안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둘째가 "누나, 포켓몬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 뭐야?"라고 물으면, "피카츄! 왜냐하면 귀엽고 강하니까"라고 답했다. 대화는 게임으로 이어지더니, 책 이야기로, 보드게임 규칙 설명으로, 포켓몬 카드 컬렉션 자랑으로, 심지어 노래 부르기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다 같이 '아파트' 부르자!" 하며 웃음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순간마다 내 가슴이 뭉클했다. 창밖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호수와 숲, 그 속에서 아이들이 웃는 모습은 남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기적 같았다. 8년의 고통이 이 순간을 더 빛나게 만들었다.

여행지에서 딸은 더욱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이전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느라 늘 구석으로 숨기 바빴다. 카페에 앉아도 창가 자리를 피하고, 눈을 내리깔며 주변을 의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토론토의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에서 공룡 화석을 보며 "와, 이게 진짜야?"라고 감탄하며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오타와의 국립 미술관에서는 작품 하나하나를 살피며 몰입했다. "이 그림의 색감이 너무 예뻐요"라고 중얼거리며,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식당에서는 음식의 맛을 음미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 모습이 새삼스럽고 감사했다. 지난 8년의 고난이 있었기에, 아무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순간에 감사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호숫가에서 가족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이 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를 빚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이 말했다. "내년엔 어디로 가면 좋을지 지금부터 계획하자. 한국이나 영국 어때?" 그 말이 그저 놀랍고 감사할 뿐이었다. 딸이 즐거워하니 둘째도 덩달아 신나했고, "나도 한국에 가고 싶어! 맛있는거 가고 먹자!"라고 맞장구쳤다. 우리는 가족회복이 주는 덤 같은 기쁨을 누렸다. 그 여행은 단순한 휴가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선교와 새로운 만남

여행 후 3주 뒤, 딸은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마음으로 과테말라 단기선교를 떠났다. 과테말라는 화산과 열대 우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나라지만, 딸에게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해외에서 지내는 도전이었다. 선교팀은 현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의료 봉사를 하며, 지역 주민들과 아이들과 소통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집을 떠나 오래 지내면 식생활 균형이 깨지기 쉽다. 특히 딸처럼 불안장애가 있는 경우, 영양 불균형이 감정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영양 보충 대체품을 준비한다. 이번에도 슈퍼그린 잎채소와 다양한 과일, 채소를 분말로 만든 제품을 챙겼다.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먹어"라고 당부하며, 선교팀에 전달했다. 과테말라의 더운 기후와 낯선 음식 속에서 이 작은 관리가 큰 역할을 했다. 영양 균형이 무너지면 감정이 부정적으로 흐르기 쉽기에, 이 관리가 선교 사역과 딸의 정서 안정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딸은 나중에 "그 덕분에 피곤할 때도 버틸 수 있었어"라고 말했다.

선교 중 딸에게 불안이 올라오는 날이 있었다. 현지 학교에 가서 봉사하던 중,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언제 끝날까"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때 선교팀에 함께한 한의사 목사님에 딸을 보시더니,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라고 하시며 침을 놓아주셨다. 침을 놓으면서 자세와 감정의 연관성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자신감 저하로 움츠린 자세가 등을 굽히고 가슴을 닫히게 만들지. 그로 인해 폐와 심장 같은 장기에 뻗쳐있는 신경과 혈액순환도 굽어진 자세 때문에 원활하게 머리와 상부를 신경전달과 혈액순환지 잘 오고가지 못하게 되지. 그러는 동안에 뇌신경 전달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불안이 더 커지는 거야." 단순히 정신적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 구조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이었다. 목사님은 "돌아가면 침을 맞는 것도 좋지만 물리치료나 도수치료를 병행해. 자세 교정이 감정조절에도 도움이 될 거야"라고 조언하셨다. 선교지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만남을 통해 또 다른 치료의 길이 열렸다. 그 순간, 딸은 "하나님이 여기서도 나를 도우시네"라고 느꼈다. 선교에서 귀국 후 우리는 믿음으로 딸의 물리치료 36회 과정을 등록하고 받기 시작했다. 매주 치료실에서 딸의 등이 펴지고, 걸음걸이가 자신감 있게 변하는 모습을 보며 희망이 솟았다.

다면적 치료와 믿음의 여정

사람들은 정신과적 증상에 직면할 때,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떤 이들은 순전히 의학적 접근에 의존하며, "약물 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라고 굳게 믿는다. 반대로, 다른 이들은 영적·신앙적 해결책에만 매달려 "기도와 믿음만으로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실 테니"라고 확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경험상, 이러한 두 극단적인 태도는 모두 한계를 드러낸다.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단순한 증상 완화가 아니라, 문제의 뿌리 깊은 원인을 파헤치는 것이 핵심이다.

내 딸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고자한다. 처음에 우리는 뇌 구조의 이상, 가족 내 역동성의 갈등, 가족 유전적 경향, 또는 특정한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원인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깊이 탐구한 결과,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트리거가 되긴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원인들이 드러났다. 바로 영양 불균형과 신체적 불안정성(예를 들어, 특정 영양소의 부족이나 호르몬 불균형)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러한 기반적인 취약점이 쌓인 상태에서, 일상적인 삶의 사건들(작은 실패나 스트레스 유발 사건)이 점차 쌓여 불안을 증폭시켰다. 이 불안은 자연스럽게 성과 저하를 초래했고, 그로 인한 자책감이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우울이 깊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결국 극심한 불안이 공황 발작으로 폭발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했다. 마치 눈덩이가 굴러 내려가며 점점 커지는 것처럼, 초기의 작은 균열이 전체적인 정신적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정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놀라울 만큼 분명했다. 적절한 시기에 적합한 의료 전문가들을 만나게 해주시며, 하나씩 문제를 밝혀내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셨다. 예를 들어, 대체의학 전문의와의 만남을 통해 특정 영양소 결핍을 진단받았고, 그 치료가 불안을 완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다른 의료인과의 상담에서는 신체적 요인을 조정하는 방법을 배웠고, 이는 딸의 감정적 안정성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듯했다. 각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증상 관리 너머의 깊은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다. 결국, 의학과 신앙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진정한 회복의 문이 열린다는 교훈을 얻었다.

특히, 우리의 치유 여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순간은 브릿지포트 대학에서 대체의학을 연구하시던 신디 교수님과의 만남이었다. 교수님은 딸의 오랜 편식 습관을 세밀하게 분석하시며, "딸아이의 경우, 영양 불균형이 신경전달물질의 고갈을 초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세로토닌과 도파민 같은 핵심 물질이 부족해지면, 기분의 급격한 변화와 부정적 감정의 악순환이 발생하죠. 이는 마치 연료가 떨어진 엔진처럼, 뇌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하는 원리가 됩니다"라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습다. 이 진단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고, 단순한 증상 완화가 아닌 근본적인 영양 균형 회복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우리는 즉시 식이요법과 영양 교정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채소 중심의 균형 잡힌 식단을 기본으로 하여, 항염증 효과가 뛰어난 오메가3 보충제와 에너지 대사에 필수적인 비타민 B군(특히 B6, B9, B12)을 강조하며 매일 섭취량을 꼼꼼히 체크했습니다. 이 변화는 예상치 못할 만큼 빠르고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딸의 만성 피로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자연스러운 웃음이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쉽게 지치고 우울해하던 아이가, 조금씩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이 확인되었고 일상적인 활동을 즐기게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영양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고 직접적인지 깨닫게 해준 귀중한 교훈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또 다른 교훈을 얻었다. 이미 장기간 고갈된 신경전달물질을 신속하게 회복하려면, 식이요법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약물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인정하며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이는 제 자신의 고집과 선호하는 방법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연약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편협한 시각으로 다면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고, 결국 치유의 길을 더디게 만든다. 마치 안개 낀 길을 걷는 듯한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시행착오를 통해 배웠다.

그로부터 약 3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마침내 약물 요법을 영양 교정과 병행하며, 가족 전체가 함께하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 통합적인 접근은 단순한 치료가 아닌, 삶의 재구성을 의미했다. 매일 저녁 식사 후, 가족이 모여 보드게임을 하거나 밖을 산책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었다. 그리고 서서히 가족예배를 다시 세워 나갔다. "하나님, 오늘도 치유의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함께 외치며, 신앙의 힘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경험하는 길로 나아갔다. 이 루틴은 우리 가족에게 결속력을 더해주었고, 딸의 회복 과정에 영적 지지를 더했다.

 

점차 딸은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았고, 믿음도 깊어져 갔다. "엄마, 이제 학교 가는 게 기대가 될 때가 더 많아"라고 말하는 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고였다. 이 말은 단순한 일상적 변화가 아니라, 깊은 내면의 치유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의학적·영양적·영적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여정은 우리에게 '전체론적 치유'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한편, 우리의 여정에서 다른 가정들의 사례를 접하며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특히 한 지인의 가족은 자녀의 불안장애를 오로지 신앙 중심의 요법으로만 대처하려 했다. 그들은 아이가 외부 세계와 스스로를 분리하려는 경향을 보이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아이의 방 문을 아예 떼어내고 집 안 전체에 찬양 음악을 끊임없이 틀어놓았다. 이러한 접근은 아이의 내면적 안정을 도모하기보다는, 오히려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환경을 조성하며 증상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아이는 정신병원의 폐쇄 병동을 여러 차례 오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왜 나만 이렇게 고통받아야 해?"라고 울부짖으며 깊은 절망에 빠졌다. 부모는 이를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라고 자책하며, 죄책감과 무기력함의 굴레에 갇혀 있었다. 이 사례를 보며, 내가 그 가족의 상황을 완벽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정신과적 문제가 신앙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영적 지지가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경험은 부모로서의 태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준다. 자녀의 고통 앞에서 부모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신앙적 고집을 내려놓아야 한다. 문제를 외부의 시선에서 감추려 하거나, 단일한 방법에 집착하는 대신, 솔직하게 직면하고 다각적인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교회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며 영적 지지를 구하는 동시에, 전문 의료인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이는 약함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니라, 지혜로운 선택이 된다. 우리 가족의 경우, 의료적 치료(영양 균형, 약물 요법 등)와 신앙적 신뢰가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진정한 회복의 문이 열렸다. 이 통합적인 여정은 단순한 증상 완화가 아닌, 가족 전체의 성숙과 깊은 치유를 가져다주었다. 결국, 정신 건강 문제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기회이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이 만나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개별화된 치유 여정

나는 정신과 전문 간호사는 아니지만, 의료인으로서의 경험과 신앙인으로서의 확신을 바탕으로 단언할 수 있다: 정신과적 문제는 결코 단일한 공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각 개인의 삶은 독특한 배경과 맥락으로 엮여 있기에, 세밀한 관찰과 맞춤형 접근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는 약물 치료가 즉각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며, 또 다른 이에게는 심리 상담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우리 가족의 경우처럼, 영양 불균형과 신체적 요인을 다루는 치료가 근본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인간의 복잡성을 반영하며, 단순한 '하나의 해결책'으로는 부족함을 드러낸다. 오히려, 다각적인 진단과 조합된 전략이 진정한 회복으로 이어지는 길이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자리 잡고 있다. 지혜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필요한 만남을 미리 예비하시며, 가장 적합한 치료의 길로 인도하신다. 마치 길잡이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과테말라 선교지에서 만난 한의사 목사님처럼, 먼 땅에서 온 전문가가 우리의 퍼즐에 딱 맞는 조각을 제공할 수 있다. 그분은 전통 의학과 신앙을 조화롭게 결합하며, "몸과 영혼은 하나이니,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치유하라"고 조언하셨다. 이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인 개입이었음을 깨달았다. 결국, 치유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어우러진 협력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의학적 지식은 도구가 되고, 신앙은 그 도구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 원리는 우리 가족이 8년이라는 긴 여정을 통해 체득한 소중한 교훈이다. 그 어둠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단련시켰고, 가족 간의 유대감을 깊고 견고하게 다져주었다. 초기의 혼란과 절망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했다. 부모로서의 책임감이 커졌고, 자녀는 가족의 지지를 통해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을 통해 우리를 빚으시고, 점진적인 회복의 길로 이끄셨다. 마치 도공이 진흙을 빚어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드는 과정처럼, 그분의 손길은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셨다. 이제 딸은 밝은 미소로 "내년에 가족 여행 계획 세우자!"라고 말하며 미래를 기대한다. 이 변화는 단순한 증상 완화가 아니라, 영혼 깊숙이 스며든 치유의 증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다른 가족들에게도 희망의 불씨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신과적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명확하다: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며 앞으로 나아가라. 그분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아침을 약속하신다. 우리의 여정이 증명하듯, 개별화된 치료와 신앙의 조화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열쇠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열쇠는 하늘의 문을 여는 것처럼, 영원한 샬롬을 가져온다.

bottom of page